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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2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
좋은 책/놀이2009. 11. 12. 09:31
 한경애,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 그린비 2007


 

신과 ‘함께’ 자연과 ‘함께’ 혹은 이웃과 ‘함께’ 논다는 것이 중요하다. 놀이는 언제나 ‘관계 만들기’ 이기 때문이다. 놀이는 친구들과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며 새로운 관계를 조성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에이, 혼자서도 잘 논다고? 컴퓨터나 만화책만 있으면? 그야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결코 혼자 노는 게 아니란 것이다. 1인용 게임을 하고 있을 때조차 가장 즐거운 때는 바로 게임과 나 사이의 파장이 일치하는 순간, 나와 게임이 합체한 듯 느껴지는 그 순간이 아닌가. 음악마니아나 애니메이션 광처럼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에게 놀이는 바로 무언가 나 아닌 것과 공감하는 바로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한경애의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에서는 저자의 필체가 보이는듯하다. 요즘은 손글씨 구경할 일이 별로 없지만 글씨에서도 얼추 그 사람을 볼 수 있지 않았든가! 활달하고 성격 급하여 빠른 속도로 써 갈기지만, 필체 자체가 독특한 형상을 갖추어 아주 멋스러운 사람! 이건 부럽다는 얘기이다.


책 한 권의 원고를 끝내보니 책이 좀 더 다가온다. 내 원고의 맹점인 ‘인용과다, 관념성, 설익은 소신’이 아프게 다가오면서,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저자가 더욱 돋보인다. 내가 주로 책에서 배우는 유형이기도 하지만, 내 속에서 우러난 이야기가 빈약해서 자주 짜깁기를 한 것에 비해, 저자는 세상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을 자신의 언어로 힘차게 쏟아내고 있었다. 곳곳에서 촌철살인격의 인용과 사례가 그런 저자를 호위하고 있었다.

수유너머에서 공저 한 권을 쓴 다음의 첫 책으로 보이는데 어찌나 글빨 말빨 에너지빨이 좋은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자신의 생활과 철학이 고스란히 투여된 책이어서 그럴 것이다. 한경애는 책 앞날개에 소개된 관심사만 보아도 ‘놀이의 달인’으로 보인다.
수유너머, 진보넷, 대추리 스콰터들, 이주노동자, 자전거로 미래를 달리는 발바리들로도 모자라 밴드를 만들고 싶다는 숙원을 위해 얼마 전부터 베이스 기타를 연습하고 있단다. 그 관심의 다양성과 활동성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책의 전반에 걸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전해 주고 싶다는 애정이 넘쳐난다. 중학교 교사답게 청소년을 염두에 둔듯 군데군데 말 놓아가며 반복 학습시켜 가며 참 재미있게 썼다. 인간들의 놀이본능이 어떻게 억압되어 왔는지 그 역사와, 상업주의의 억압을 뚫고 날아오른 참을 수 없는 ‘즐거움’들의 사례가 모두 재미있었지만 위 구절에서 가슴이 철렁했다.


놀이는 언제나 ‘관계 만들기’ 이다.


인정한다. 이젠 혼자놀기에 능하다는 말도 쓰지 말아야겠다. 언제나 나를 가슴떨리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 대상과의 합일이었음을 인정해야겠다. 위 구절은 내 관계전선을 순식간에 업그레이드시켜 주었다. 저자가 고맙고 우리가 책을 통해 연결되어 있는 종족이라는 것이 고맙다. 내 마음에 들어온 구절을 몇 개 더 소개한다.

 


아메리카 인디언인 아코타족에게는 전투조차 놀이이다. 그들에게 대지는 신이 우리에게 빌려준 것일 뿐 누구의 소유도 아니니 영토를 소유하기 위한 전쟁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 그 자체를 신이 준 선물로 여기는 인디언들에게 전쟁은 호연지기를 키우기 위한 놀이이다. 적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가가 아닌 얼마만큼 위험을 무릅썼는가가 명예의 기준이 되고 포로는 융숭한 대접을 받은 뒤 집으로 돌아간다.


“영국 국기에 검은 색은 없으니 깜둥이들은 꺼져!”

훌리건들이 부르는 응원가의 일부이다. 중략. 유색인종 선수들에게 오물을 던지고 칼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그들. 우리는 어째서 놀이마저 전쟁으로 만드는 것일까?


어느샌가 노는 것이 소비와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축제에서부터 여행까지 모든 것이 상품인 이 세계에서 우리는 돈 없이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지 못한다. 신용카드야말로 플레이어 라이센스라고 말하는 소비자본주의의 당당함.


그리스어와 라틴어에는 노동을 정의하는 단어가 거의 없다. 노동이라는 말은 오직 ‘여가가 없는’이라는 뜻의 단어 askholia/negotium으로만 표현된다. 이 언어들에서 삶의 중심은 노동이 아니라 놀이인 것이다.


즐거움만이 우리를 놀게 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놀기 위해선 아주 중요한 능력이 필요하다. 기차에서 무작정 내리기 위해서 창 밖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다는 걸 발견해야 하듯이. 세상과 놀기 위해서 우리는 견고해 보이는 이 세계에서 무수한 차이들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어딜 가도 거기가 거기같이 느껴진다면 아무 데도 갈 필요가 없지 않겠어?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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