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3.31 <27호> '서사'와 '묘사'라는 두 마리 토끼
  2. 2010.03.08 <18호>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 (2)
한명석의 writingsutra2010. 3. 31. 00:07
 

책 한 권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읽어 치웠다.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 ‘성장’이다. 360페이지. 다 읽고 나서 눈물이 솟구쳤다. 삶의 끝에 버티고 있는 소멸을 보아버린 탓이다.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지루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저자는 책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 그저 보통의 삶을 풀어내는데 흡입력이 대단하다. 그는 독자가 늘어질 틈을 주지 않고 한 발 먼저 장면을 바꾼다. 소제목도 없이 숫자만 매겨진 챕터마다 간결하고 힘있는 문체와 빠른 속도로 새로운 국면을 펼쳐 놓는다. 

여든의 연세로 어머니의 적적함은 끝이 났다. 그 해 가을 이후로 어머니의 정신은 시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떤 날엔 반세기 전에 있었던 결혼식과 장례식엘 다녀오셨고, 어떤 날은 이젠 백발이 다 되어 버린 그 옛날의 아이들을 위해 일요일 오후 내내 준비한 저녁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으시기도 했다.

상황으로 시작하든,

1931년 1월,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뉴욕으로 가셨다.

시점으로 시작하든, 그의 첫 문장은 나를 빨려들게 한다.

해럴드 고모부는 거짓말의 귀재였다.

이처럼 단순한 문장조차 그의 리듬에 얹혀 지면 달라진다. 그는 60년 세월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강약을 두어 재창조했다. 극히 부분적인 사건들을 통해 그의 삶의 전모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는 그가 만들어낸 속도에 빠져든다.

“어떻게든 잘되겠지.” 내가 고등학교 졸업반에 올라가면서부터 어머니는 그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그것은 꼭 필요한 부분만을 추려낸 과감함과, 생생한 인물들, 살아있는 대화체의 덕분이다.

1981년 가을, 미미와 나는 태어난 지 석 달 된 손녀를 보러 작은아들의 집이 있는 버지니아로 차를 몰았다.

때로 30년을 뛰어넘기도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 장면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끝내는 구성의 힘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저자는 그의 스토리텔링에 적절한 속도감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성공은 그것뿐이 아니다.

그의 문장은 간결한가하면 정교했다.  그가 묘사한 인물은 어찌나 생생한지 꼭 아는 사람 같고, 그가 묘사한 공간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꼭 한 번 가 보고 싶고, 그가 묘사한 시간은 어찌나 감미로운지 나도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성탄절이 되면 어머니는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다정다감해지셨다. 성탄절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면 어머니는 집에서 만든 맥주를 깡통들에 담아 밀봉해서 효모가 발효되도록 욕실에 보관해 두셨다. 욕실 옆에 붙어 있는 주방에 앉아 있다 보면 가끔 욕실에서 펑하며 깡통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터지는 것을 감안해서 늘 넉넉한 양을 준비하셨다. 어머니는 예쁘게 포장한 선물들을 당신의 옷장 안에 넣어 두고 소녀와 같은 기쁨을 맛보셨다. 성탄을 하루 앞두고 어머니는 신들린 듯이 음식을 만드셨다. 케이크와 파이를 만들고 소나무와 산타클로스 모양의 생강 쿠키도 구워 내셨다. 오후에는 도리스와 나를 데리고 키작은 소나무가 한 가득 쌓인 시장에 나가 크리스마스 트리를 고르셨다. 어머니는 정확하게 좌우 대칭인 나무를 찾아서 수십 그루의 나무를 헤집곤 하셨다.


모리슨빌은 20세기와의 투쟁을 준비하기에는 적당한 곳이 못 되었지만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는 유년을 보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햇살에 흠뻑 젖을 수 있는 여름에는 미나리아재비가 들판을 노랗게 뒤덮었고 헛간엔 건초가 가득 쌓여 있었다. 뒤뜰에는 보랏빛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나무에 달려 있었고 할머니 댁 처마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덩굴에서 실려 온 바람에는 라벤더 꽃내음이 가득 담겨 있었으며 담장엔 들장미가 만발했다.


남자들이 모두 일터로 간 뒤 여자들이 잠깐 낮잠에 드는 오후가 되면 나는 뙤약볕을 쪼이며 깊고 경이로운 침묵 사이를 걸었다. 침묵은 너무나 깊어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침묵이 흐르는 중에도 자연의 오케스트라는 도시 아이들이 결코 들어보지 못할 음악을 연주했다. 닭장에서 꼬꼬댁 소리가 들리면 그건 닭이 알을 낳았다는 신호였다. 처마 아래 매달아 놓은 작은 그네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면 그건 산들바람이 할머니 댁 뒤뜰을 지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리즈 버츠 씨네 마구간 앞을 인디언마냥 잽싸게 지나가다 보면 말이 파리떼를 쫓기 위해 꼬리를 휘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끼낀 개울가에서 발끝으로 살금살금 개구리에게 다가갈 때 퐁당 소리가 들리거든 그건 개구리가 사냥꾼을 발견하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신호음이었다. 낮잠에 든 집들 사이를 지나며, 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양철 지붕들이 딱딱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았다. 녹초가 되어서 할머니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거실 바닥에 길게 누워 똑딱똑딱 시계추 소리를 들으며 최면에 빠지듯 잠이 들곤 했다.

정신없이 빨려들게 하는 이야기의 힘! 이미지는 물론 소리와 냄새까지 살아있는 그의 장면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서사’와 ‘묘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 ‘서사’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묘사’란 사물과 공간이 어찌어찌하다는 양상을 기술하는 것이다. ‘서사’에 치중하면 속도감은 있으나 자칫 건조하다. ‘묘사’에 치중하면 실감을 주지만 잘못하면 지루하다.  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 두가지를 적절하게 구사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처럼 좋은 교과서를 발견해서 흐뭇하기 그지없다. 그밖에도 배울 점이 무궁무진한 책이지만 말이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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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의 writingsutra2010. 3. 8. 00:53
 

 말로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 이것 또한 글쓰기에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호하다면 다음 예시를 보라. 다음 예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예1>은 ‘설명’을 하고, <예2>는 ‘보여주고’ 있다. -개리 프로보스트의 '전략적 글쓰기'에서-

<예1>나의 새 남자친구 아놀드는 탁월한 운동선수야. 그는 또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똑똑하고, 매우 감상적이고, 그러면서도 약간은 묘하기도 해


<예2>나의 새 남자친구 아놀드는 지난주 번개까지 치는 폭풍우 속을 5마일이나 달려 나의 오두막집으로 왔어. 여기에 도착해서도 그는 빗속에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다섯 개 언어로 외치기 시작하더군.

‘탁월하다’거나 ‘묘하다’는 말은 너무 관념적이다. 그대가 전달하고 싶은 사람이 어떻게 탁월하고 어떻게 묘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추상적인 어휘를 피하고 눈에 잘 보이는 동사와 구체적인 형용사를 효과적으로 구사하라. 개념이 아닌 그림으로 보여주라. 그 편이 훨씬 더 생생하게 전달되고 선명하게 기억된다. ‘그는 키가 크다.’보다 ‘그는 키가 184센티미터이다’가 훨씬 눈에 잘 보인다. ‘그 여자는 미인이다.’는 너무 불확실하다. ‘그 여자는 눈이 서글서글하다.’ 혹은 ‘그 여자는 콧날이 시원스럽게 길다.’ 라고 하는 것이 잘 보인다. ‘보여주는 글쓰기’를 위한 방법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개별적으로 접근하라.

영화 ‘작업의 정석’에서 송일국은, ‘여자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표현하라’고 한다. ‘당신은 꽃처럼 아름다워요’가 아니라, ‘당신은 프리지아처럼 향기가 참 좋네요’라는 것이다. ‘당신은 백합 같아요’에서 그치지 말고, ‘당신은 백합처럼 아름답기도 하지만, 추위에 약하고 쉽게 토라져 버리는 모습이 늘 나를 불안하게 해요’까지 나아가라는 것이다. 두루뭉수리하게 넘어가지 말고 구체적인 그 사람, 특정한 장면이 드러날 때까지 나아가라. 작업의 정석은 글쓰기에서도 통용된다.


둘째, 글을 쓸 때 오감을 일깨우도록 노력하라.

‘오감’이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각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보여준다’고 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나머지 감각의 활용에도 도전하라.


‘더러운 남자’는 어느 정도 눈에 보인다. ‘더러운’이 시각적인 정보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냄새까지도 전해 주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목요일쯤이면 항상 몸에서 걸레 썩는 냄새가 나는 남자’는 어떤가. 나도 모르게 코를 감싸 쥐며 인상이 써지지 않는가. 보여준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먹구름이 ‘청설모가 지나다 꼬리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쏟아질 것처럼 낮게 드리워져 있다.’는 표현을 본 적이 있다. 재바르게 뛰어다니는 청설모의 동작과 함께, 잔뜩 찌푸린 날의 그림이 그려진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차고의 문이 말려 올라가고, 그러고는 풀려 내려오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같은 문장에는 소리가 살아 있다. 어느 정도 글을 쓰는 데 익숙해졌다면 글을 수정할 때, 오감을 활용하는 표현이 되도록 신경을 써 보아도 좋겠다. 김영하, 김애란처럼 잘 나가는 젊은 작가들의 문체가 감각적인 것은 여기에 통달한 탓인지도 모른다.


셋째, 사생글 쓰기를 연습하자.

사생글이란 그림을 그리듯이 자세하게 관찰하여 쓰는 글을 말한다. 글이 유독 무미건조하거나 두어 줄 쓰고 나면 쓸 것이 없다는 사람이 연습하면 좋다. 일상의 어느 장면에서나 훈련할 수 있다. 마트에 갔을 때나 전철로 이동할 때, 수시로 눈앞의 장면을 그림 그리듯 묘사한 문장을 떠올려 보라.  나는 지금 도서관에 있는데, ‘주말 도서관은 마치 유원지처럼 사람이 많다. 초등학생들이 키득거리며 몰려다니는가 하면, 온 가족이 나온 경우도 많다. 도서를 검색하는 컴퓨터 뒤에 사람이 얼마나 늘어섰는지 자료검색을 포기하고 돌아섰을 정도이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 그야말로 책상 앞에 써 붙여놓아도 좋을 만큼 중요한 지침이다. 안정효의 ‘글쓰기만보’에서 본 글을 재인용한다. 강물에 발을 담그고 서 있는 것 같다.



그늘진 곳에서 깊고도 깊이 흐르는 강의 목소리는 저만치 앞쪽 햇살이 눈부신 곳에서 흐르는 강의 목소리하고는 다르다. 절벽 아래 그늘진 곳은 강물이 깊어 심연의 소리를 내며, 가끔 흐름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되돌아서서는, 자신이 하는 얘기를 스스로 알아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똑같은 말을 한두 번 더 되풀이했다. 하지만 앞쪽의 강물은 호들갑을 떨고 시끄럽게 재잘대며 화창한 세상으로 냅다 달려 나갔다.

 -노먼 매클린, ‘흐르는 강물처럼’-



** 빨간 글씨는 안정효의 '글쓰기만보'에서 인용했습니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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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른퀴리

    작업의 정석,ㅡ누군가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ㅡ아주 쉽게(!) 잘 알았슴다~
    특정한 장면이 드러날 때까지 나아가라구요....

    전, 3월이 가끔은 새해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신년 1월, 설날에 이어
    새롭게 입학을 하고 새로운 학년이 되고(아이는 다시 학교품으로ㅡ에고,신나라! )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새해처럼 느껴지는 봄과 함께
    저도 요즘 매일매일 작가(ㅎㅎ 오늘아침 글쓴사람ㅋㅋ)합니다.
    모닝페이지로 그냥 메꾸기....^^

    미탄님의 writingsutra, 열심히 챙겨 읽고 있습니다.
    글쓰기수업, 대박중이신지요? 연 닿으면 뵈올거라하면서....

    2010.03.08 11:10 [ ADDR : EDIT/ DEL : REPLY ]
    • 어이쿠, 당최 재미있는 일이 없어서
      딱딱한 글만 계속 올려 민망한데
      꾸준히 읽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3월이 새해 맞지요.
      죽은듯 옥죄였던 가슴을 열어
      저마다 꽃을 피워올림으로써
      우리도 꽃을 피우라고 부추기는,
      저 꽃나무만 보아도요.

      강좌는 조촐하게 행군중입니다.
      저도 배우는 입장이니 나쁘지 않습니다.

      아련하고 화사하고 미묘한 봄날 되시기를!

      2010.03.08 13:40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