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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8 마크툽! - 연금술사 (4)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문학동네, 2001 

열 살을 갓 넘긴 어느 날  방학이라 외가에 가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모두 어디에 갔는지 집에는 나뿐이었다. 심심해서 마루에 누워 뒹굴다가 문득 안마당을 바라보았다. 둥근 초가지붕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톡톡 튕겨나가며 작은 홈을 파고 있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아주 적막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사방이 고요해지며 차원이 다른 시간으로 들어선 것 같은 한없는 쓸쓸함,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느낀 절대고독의 순간이었다.

어릴 때 방학이면 늘 외가에 가서 놀았다. 그 때의 풍경들이 내 안에 많이 저장되어 있다. 공동우물에서 주전자로 먹을 물을 길어오는 것은 내 몫이었다.  언제나 아지매들이 모여 푸성귀를 씻거나 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우물에 다녀오는 일을 나는 즐겼다. 외숙모가 오일장에 내다 팔기 위해 깻잎을 정리하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우리들이 죽 둘러 앉아 깻잎을 열 장씩 모아 놓으면, 외숙모가 깻잎 끄트머리에 실을 서너 바퀴 감아 마루 틈에 거꾸로 꽂아놓은 면도칼에 슬쩍 갖다 대던 날렵한 손길. 이때의 경험들이 나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다. 분꽃이나 과꽃처럼 오래 된 꽃들을 보면 마냥 좋은데 그것들이 외가 장독대 앞에 피어 있었던 것을 떠올리는 순간이다.

살아온 것을 가만히 돌아보면, 우연이라고 여겼던 선택과 경로 사이에 가느다란 금이 보인다. 어려서 외가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는 대학에 들어가 농촌활동에 매료되었다. 서민가정에서 자랐는데도 농촌의 과도한 노동과 문화적으로 소외된 환경은 경악이었다. 나는 농민과 깊이 연결된 것을 느끼고 오랜 세월 농촌에 머물러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깊이 빠져 읽었던 동화책은 또 어떤가. 누구나 읽었을 동화책들에 나는 완전히 동화되었던 것 같다. ‘소공녀’를 읽으며 자존심을 배우고, ‘알프스의 소녀’를 읽으며 자연과의 친화를 부러워하고, ‘빨간머리 앤’에서 풋사랑을 알았다. 주인공이 조심스럽게 ‘비밀의 화원’에 숨어 들어갈 때 내 가슴도 덩달아 쫄밋거렸다. 나는 동화책에서 자유롭고 독특한 삶에 대한 동경을 배웠고, 이것은 내 기질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때의 경험은 결국 몇 십 년을 뛰어 넘어 작가에 도전하게 만든다. 어느 책에선가, 돈의 중요성을 알게 하기 위해 신은 돈이 아주 많게 하거나 아주 적게 하신다는 얘기를 읽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정치산자에 가까운 내 경제관념이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조금씩 단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이시여! 제 버릇 하나를 고치시기 위해 그토록 많은 장치와 곡절이 필요했나이까?

내가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만 간 것은 동화책에서 얻은 모험과 성장에 대한 지향 때문이다. 실로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아직도 지치지 않고 새로운 장을 열어젖힐 수 있는 것도 그 기질 덕분이다. 그 많은 우여곡절을 통해 단련되어 조금은 지혜로워졌으니, 내 인생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나 하나를 사람 만들기 위해 등장해 준 것이 아닌가? 삶의 변화를 간절히 바랄 때마다 나타나 준 계기는 또 어떤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행운의 모습을 하고 있든, 금방이라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 같은 총체적인 위기이든 그것들은 모두 나를 나답게 하는 누군가의 시나리오였다. 마치 누가 써 준 것 같은 대본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이 번 생에 타고난 ‘나’라는 신화를 완성하기 위해 고용된 용병일 뿐이다. 기꺼이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길은 열리게 되어 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한없이 마음이 편안해 진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지만 나는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었다. 워낙 유명하니까 서 너 번을 읽으려고 뒤척이다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비로소 이 책과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은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한 양치기의 이야기이다. 갖은 우연과 모험을 겪지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마크툽! 아랍어로 ‘그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씌어 있는 말’ 이라는 의미란다. 신은 우리가 자아의 신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스토리가 워낙 단순하고 상징적이기 때문에 황당하기도 하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 모험에의 험난한 길로 이끌기 위해 ‘초심자의 행운’을 주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와 끈기를 가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가혹한 시련이 내려진다는 부분, 연금술이란 우리 모두 자신의 보물을 찾아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을 갈구할 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함께 나아간다는 것, 그러니 우리 삶과 역사가 다 같이 신의 커다란 손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믿고, 신이 준비해놓은 표지를 따라갈 것!


여기에서 말하는 ‘신’은 어느 종교에 국한된 신은 아닐 것이다. 힘써 구하는 손길에 대답하는 만유의 손길 같은 것, 우주라고 해도 좋겠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생명이라는 크나큰 잔치에 애써 참여한다면 그 갈구가 외면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마크툽!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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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과상상

    외가에서의 경험이 아주 좋은 토대가 되셨군요.
    저는 시골 경험이 없지만 너른 평상이나 마루, 장독대 같은 것만 보면 제게 저런 추억이 있다고 상상하곤 합니다. 엄마 아버지의 추억이나 친구의 추억, 소설이나 사진을 바탕으로 상상하다가 저에게 정말로 저런 순간이 있었다고 믿을 정도로 저런 느낌을 좋아합니다.
    미탄님이 부럽습니다 ^^
    연금술사에 대한 첫인상도 비슷합니다. 베스트셀러를 경계(?)하는 성격 때문에 비판적인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지만, 읽을 수록 느끼는 것은 '상징이 많긴 하지만 실제로 이건 우리들의 이야기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미탄님이 말하는 '절대고독' 속에서 함께 사막을 헤매는 느낌도 받았구요. 연금술사 발간 이후 시크릿, 꿈꾸는 다락방 같은 피그말리온 효과를 이야기하는 책들도 많이 나오고 김연아, 박지성 같은 자신의 신화를 이룬 사람들도 많이 나온 것 같네요.
    덕분에 오랜 만에 동화들을 다시 읽고 싶어졌습니다. 조셉캡벨의 신화의 힘도 읽어야겠네요!
    비가 많이 오는데 여름 건강히 잘 보내십시요. ^^

    2010.07.28 11:25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ㅎㅎ 시골에 대한 주위의 경험을 정말 겪은 것처럼 생각하신다니 자연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십니다.^^

      고즈윈에서 나온 '내 인생의 자서전 쓰는 법'이라는 책은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480가지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 중에 어린 시절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은가? 하는 질문이 있었는데요.

      저는 저 장면을 떠올리고
      "내가 너무 에돌아 왔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너처럼 자연 속에서 고독과 영적 탐구를 벗하여 사는 것임을" 하고 확인할 수 있었지요.

      동화를 읽고 싶다는 말씀이 참 순수하게 들립니다.
      신화의 힘 강추함다!^^

      2010.07.28 23:56 [ ADDR : EDIT/ DEL ]
    • 전구

      사과상상님의 댓글에서는 상상이 가능하게 하는 소재들을 찾는 법을 배우고 미탄님의 글에서는 제 어린 시절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보는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두 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2010.07.30 11:08 [ ADDR : EDIT/ DEL ]
    • 미탄

      보는 대로 흡수하는, 학습의욕이 강한 분 같으세요.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2010.08.02 14:56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