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베이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4.13 <31호> 성장소설에는 성장이 있다 (2)
  2. 2010.03.31 <27호> '서사'와 '묘사'라는 두 마리 토끼
한명석의 writingsutra2010. 4. 13. 08:34
 

아들이 휴학을 했다. 전공에 대한 확신이 없고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1년 정도 쉬면서 생각을 좀 해봐야겠단다. 해 보고 싶은 일이라곤 한옥건축 밖에 없다는 소리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79년 대학을 졸업하던 때, 농촌활동 말고는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나는 활동 다니던 지역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농사꾼과 결혼까지 했다.

결혼은 15년 만에 거대한 오류로 판명되었다.  ‘불과’ 15년 만에 ‘어떻게 그런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들이 내 결혼처럼 황당한 결정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옥건축’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 비경쟁, 비주류, 비현실, 낭만, 자연... 인생이 아이러니한 농담처럼 반복된다더니 사실이었다. 다만 시간이 재주를 부려 이번에는 내가 부모 역할이었다. 순간적으로 장면이 바뀌어 30년 세월이 흐른 영화나 소설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아들이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고스란히 답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살면서 깨달은 것을 아들에게 강요하게 될까봐 자제해야 했다. 그래도 알려주고 싶었다. 필요한 정보를 뇌에 입력하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이란 참으로 더디고 미욱한 동물이다. 어찌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인생의 문제를 일일이 몸으로 부딪쳐가며 가장 어려운 방법으로 풀어가니 말이다. 그렇게 아프게 배운 것만이 내 것이 된다고 말하기엔 너무 안타깝다. 내가 유독 시간을 많이 낭비한 탓일 것이다. 그 많은 시간과 기회를 날려버린 생각을 하면 기운이 쫙 빠진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사람이 나처럼 어렵게 배우는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한 번 살아본 것처럼 야무지게 자기 갈 길을 간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전에 학원 할 때 자수성가한 동료원장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의 경우에는 삶의 가혹함을 미리 깨달은 것이 득이 되었을 것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은 아직도 유효하다.  만일 돈 주고도 고생을 살 수 없었다면 미리 인생을 맛보는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성장소설을 읽는 것이다.

러셀 베이커는 어린 시절, 자신의 존재가 어머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싫었다. 자신이 어머니의 미래인 것도 못마땅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미래였던 시간들을 모두 과거로 치워 없애고 스스로 시간을 창조했다. 그리고나서 자신의 약동하던 미래가 자기 아이들에게 따분한 과거가 되고 마는 것을 줄곧 지켜보아야 했다. 인생이 소름끼치도록 반복되는 춤동작 같다는 생각을 했을 때, 그는 인생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여든이 되어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모습에 정확하게 오버랩되는 자신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피와 뼈를 나눠준 한 세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마치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통증으로 감지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자전소설 ‘성장’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다. 이 책은 자신을 키워준 시공간에 대한 읍소이며, 자기 하나를 키우기 위해 등장해 준 인물들에 대한 경배다. 그는 지나간 것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사라지는 것에 대한 뜨거운 연민으로 한 장면 한 장면을 되살려냈다. 자기 인생을 책 한 권에 완벽하게 재현하며,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마치 삶이 끝난 것처럼 바닥모를 허무에 젖지 않았을까. 그 정도로 이 책은 사람을 끌어 당긴다. 책을 다 읽고 삶이 두려워 펑펑 울어버렸을 정도이다. 

이 책의 여파는 컸다. 나는 친정어머니를 모시기로 결심했다. 엄마는 서걱거리는 며느리와의 생활을 힘들어하셔서 딸들 집을 오가고 계셨다. 이미 노화의 징조는 엄마를 점령해 버렸다. 솜씨 좋고 활달하던 장년의 엄마가 아니다. 이제 어디에도 자신이 주도할 세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엄마는 빠른 속도로 자식들에게 순응해 왔다. 언제부터인가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자꾸 한정된다. 엄마는 똑같은 이야기만을 하고 또 하신다. 일흔 여섯, 오래지않아  엄마의 총기가 불시에 흐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기만 해도 무섭다.

그런데 엄마를 돌보는 것이 내 삶에 대한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껏 하고 싶은 일을 모조리 하며 살아 왔다. 한 번도 남을 위해 희생한 적이 없고, 뼈 빠지게 일한 적도 없다. 무엇엔가 열중하여 밤을 새워본 적도 거의 없고, 코피를 흘려 본 적도 없다. 심지어 연애다운 연애를 해 본 적도 없다. 이렇게 밋밋하고 데면데면한 삶에 치열함 하나를 더하고 싶었다. 이것은 노인을 모시는 일이 끔찍하고 처절한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엄마를 모시겠다고 결심한 순간, 나는 아이들보다 엄마 편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아이들이 힘들어 하거나 심지어 반대한다 해도 내 결정을 관철하겠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얼마든지 자기네 힘으로 살 수 있을 테니,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머물러야 하겠다.

나는 러셀 베이커의 ‘성장’을 읽고 이런 결심을 할 수 있었다. 그 책 속에서 미리 보아버린 소멸이 나를 비장하게 만들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었고, 아직 겪지 않은 일에 맞설 수 있게 되었다. 성장소설에는 삶이 들어 있다. 삶의 저 편에 미리 가 볼 때 우리는 부쩍 성장할 수 있다. 그것은 아들처럼 젊은 친구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Posted by 미탄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비밀댓글입니다

    2010.08.02 22:29 [ ADDR : EDIT/ DEL : REPLY ]
    • ㅎㅎ 혼자 생각만 벅찼을 뿐, 엄마가 허락하지를 않지요. 그러리라고 짐작하면서도 혼자 결심하기까지에도 그렇게 어려웠던 걸 생각하면, 인연의 허약함에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것 같아요.

      삶이 단순하게 느껴지면, 많이 산 것이라더니
      요즘은 자꾸 삶이 단순하게 느껴지네요.
      -- 많이 살았으니 당연한 건가요?^^

      님처럼 차분하게 주변 사람의 글 속에서도 교훈을 얻는 분은, 지혜롭게 잘 살아갈 것 같아요. 너무 단순하여 결곡하게 느껴지는 삶의 정수를 알 것 같아요. 살아보지 않고도.^^

      2010.08.05 17:54 신고 [ ADDR : EDIT/ DEL ]

한명석의 writingsutra2010. 3. 31. 00:07
 

책 한 권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읽어 치웠다.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 ‘성장’이다. 360페이지. 다 읽고 나서 눈물이 솟구쳤다. 삶의 끝에 버티고 있는 소멸을 보아버린 탓이다.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지루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저자는 책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 그저 보통의 삶을 풀어내는데 흡입력이 대단하다. 그는 독자가 늘어질 틈을 주지 않고 한 발 먼저 장면을 바꾼다. 소제목도 없이 숫자만 매겨진 챕터마다 간결하고 힘있는 문체와 빠른 속도로 새로운 국면을 펼쳐 놓는다. 

여든의 연세로 어머니의 적적함은 끝이 났다. 그 해 가을 이후로 어머니의 정신은 시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떤 날엔 반세기 전에 있었던 결혼식과 장례식엘 다녀오셨고, 어떤 날은 이젠 백발이 다 되어 버린 그 옛날의 아이들을 위해 일요일 오후 내내 준비한 저녁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으시기도 했다.

상황으로 시작하든,

1931년 1월,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뉴욕으로 가셨다.

시점으로 시작하든, 그의 첫 문장은 나를 빨려들게 한다.

해럴드 고모부는 거짓말의 귀재였다.

이처럼 단순한 문장조차 그의 리듬에 얹혀 지면 달라진다. 그는 60년 세월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강약을 두어 재창조했다. 극히 부분적인 사건들을 통해 그의 삶의 전모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는 그가 만들어낸 속도에 빠져든다.

“어떻게든 잘되겠지.” 내가 고등학교 졸업반에 올라가면서부터 어머니는 그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그것은 꼭 필요한 부분만을 추려낸 과감함과, 생생한 인물들, 살아있는 대화체의 덕분이다.

1981년 가을, 미미와 나는 태어난 지 석 달 된 손녀를 보러 작은아들의 집이 있는 버지니아로 차를 몰았다.

때로 30년을 뛰어넘기도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 장면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끝내는 구성의 힘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저자는 그의 스토리텔링에 적절한 속도감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성공은 그것뿐이 아니다.

그의 문장은 간결한가하면 정교했다.  그가 묘사한 인물은 어찌나 생생한지 꼭 아는 사람 같고, 그가 묘사한 공간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꼭 한 번 가 보고 싶고, 그가 묘사한 시간은 어찌나 감미로운지 나도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성탄절이 되면 어머니는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다정다감해지셨다. 성탄절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면 어머니는 집에서 만든 맥주를 깡통들에 담아 밀봉해서 효모가 발효되도록 욕실에 보관해 두셨다. 욕실 옆에 붙어 있는 주방에 앉아 있다 보면 가끔 욕실에서 펑하며 깡통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터지는 것을 감안해서 늘 넉넉한 양을 준비하셨다. 어머니는 예쁘게 포장한 선물들을 당신의 옷장 안에 넣어 두고 소녀와 같은 기쁨을 맛보셨다. 성탄을 하루 앞두고 어머니는 신들린 듯이 음식을 만드셨다. 케이크와 파이를 만들고 소나무와 산타클로스 모양의 생강 쿠키도 구워 내셨다. 오후에는 도리스와 나를 데리고 키작은 소나무가 한 가득 쌓인 시장에 나가 크리스마스 트리를 고르셨다. 어머니는 정확하게 좌우 대칭인 나무를 찾아서 수십 그루의 나무를 헤집곤 하셨다.


모리슨빌은 20세기와의 투쟁을 준비하기에는 적당한 곳이 못 되었지만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는 유년을 보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햇살에 흠뻑 젖을 수 있는 여름에는 미나리아재비가 들판을 노랗게 뒤덮었고 헛간엔 건초가 가득 쌓여 있었다. 뒤뜰에는 보랏빛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나무에 달려 있었고 할머니 댁 처마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덩굴에서 실려 온 바람에는 라벤더 꽃내음이 가득 담겨 있었으며 담장엔 들장미가 만발했다.


남자들이 모두 일터로 간 뒤 여자들이 잠깐 낮잠에 드는 오후가 되면 나는 뙤약볕을 쪼이며 깊고 경이로운 침묵 사이를 걸었다. 침묵은 너무나 깊어 옥수수가 자라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침묵이 흐르는 중에도 자연의 오케스트라는 도시 아이들이 결코 들어보지 못할 음악을 연주했다. 닭장에서 꼬꼬댁 소리가 들리면 그건 닭이 알을 낳았다는 신호였다. 처마 아래 매달아 놓은 작은 그네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면 그건 산들바람이 할머니 댁 뒤뜰을 지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리즈 버츠 씨네 마구간 앞을 인디언마냥 잽싸게 지나가다 보면 말이 파리떼를 쫓기 위해 꼬리를 휘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끼낀 개울가에서 발끝으로 살금살금 개구리에게 다가갈 때 퐁당 소리가 들리거든 그건 개구리가 사냥꾼을 발견하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신호음이었다. 낮잠에 든 집들 사이를 지나며, 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양철 지붕들이 딱딱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았다. 녹초가 되어서 할머니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거실 바닥에 길게 누워 똑딱똑딱 시계추 소리를 들으며 최면에 빠지듯 잠이 들곤 했다.

정신없이 빨려들게 하는 이야기의 힘! 이미지는 물론 소리와 냄새까지 살아있는 그의 장면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서사’와 ‘묘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 ‘서사’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묘사’란 사물과 공간이 어찌어찌하다는 양상을 기술하는 것이다. ‘서사’에 치중하면 속도감은 있으나 자칫 건조하다. ‘묘사’에 치중하면 실감을 주지만 잘못하면 지루하다.  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 두가지를 적절하게 구사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처럼 좋은 교과서를 발견해서 흐뭇하기 그지없다. 그밖에도 배울 점이 무궁무진한 책이지만 말이다.

Posted by 미탄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