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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19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13)
 김희경,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푸른숲, 2009


이 책은 일반적인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풍광에 대한 소개와 그것과 맞닥뜨려 일어난 감흥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이 책은 여전히 여행기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아무리 먼 곳을 가든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을 생각할 때 그렇다. 이 책은 34일간 800km의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거듭 곱씹게 되는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 내가 ‘그녀의 책’이 아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블로그이웃으로 자주 접하던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쓴 책 같았다. 이지적이고 자의식 강한 전문직 여성이 아닌, 수시로 흔들리고 망설이고 외로움 타는 보통 여자가 거기 있었다.  누군가 이 책만을 달랑 읽은 독자라면 저자를 코스모스처럼 유약한 ‘천상 여자’인 줄 알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에필로그만 평소의 그녀 같다-  하지만 그녀는 대한민국 상위 1%만이 접할 수 있는 엘리트코스를 거친, 까칠한 차장급 기자이다.  자동차로 캘리포니아를 횡단하는가 하면 한때 마라톤을 했을 정도의 활동성도 지녔다. 한 사람의 내면에 이처럼 이질적인 요소가 공존할 수도 있는 거구나. 어느 쪽이 좀 더 그녀의 본질일까. 어떻게 이처럼 이질적인 요소들을 통합해내면서 살고 있을까. 


저자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벌거벗고 서 있는 것처럼 자신을 모두 드러낸 듯하다고 했지만, 그런 느낌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유능한 여성도 때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구나~~ 친근감을 느꼈을 뿐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펼쳐놓는 내면에 아는 척을 하기가 망설여졌다. 정말 그렇단 말이야? 해답을 알면서 그냥 한 번 해 보는 말은 아닐까.


그런 내 심정을 불식시킨 것은 이 부분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비유 중에, 1달란트를 그냥 가지고 있던 사람에 대해 안셀름 그륀 신부가  “그가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삶을 파묻었다”고 해석했다는 부분, 이런 문장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의 절실함이 내 마음으로 파고 들었다.  비로소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쓸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까지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할수록,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일수록,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며 일이 잘못 되면 오래 후회하는 완벽주의자들일수록 막연한 불안에 시달리는 겁쟁이들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갖고 싶은 용기는 매사를 원하는 대로 통제하려는 강박을 버리고 삶에서 우연의 여지를 열어두는 태도였다. 예기치 않은 일에 더 많은 여지를 허용하면서 살아가기, 실수를 저지르거나 일이 잘못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래도 어디까지 한번 가보겠다고 하는 마음, 내가 갖고 싶은 용기는 그런 거였다. 카미노에서도 그런 태도를 배우고 싶었다.


저자가 자신에 대해 거듭 힘들어 하는 부분이 여기에 잘 드러나 있다고 보인다.  거칠게 말해서 ‘고뇌하는 수재’와 ‘단순한 열정’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우연히 나는 ‘단순한 열정’을 타고났다. 그래서 이 쪽에 속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금은 대변할 수 있다. 전자에 속한 사람들이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자기검열에 시달리며 조심조심 많은 것을 이루었을 때, 후자에 속한 사람들은 마음이 가는 대로 저지르느라, 시간과 물자를 허비하며 다분히 변덕스럽다. 이런 상태를 용납할 수 있을 것인가? 타고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 하지 마라. 유전자가 어느 정도는 나를 규정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생긴 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되, 너무 힘들지 않을 정도로 나를 다듬는 일, 세월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한 일이다. 아픈 경험을 통해 떠올리게 된 그 기준처럼 말이다.


결국 남은 기준은 하나밖에 없다. 죽음을 상담자로 삼는 거였다. 내가 죽음을 앞둔 시점이라면 지금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는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기대, 선택의 결과, 성취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선택 이후 펼쳐질 미래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더라도 당장 그 일을 하는 게 중요했다.


장영희교수님이 가시고, 정승혜대표가 갔다. 겨우 이름만 아는 사람들이라도 죽음 앞에서 나는 숙연해진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갔는지 저자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결핍과 실수만 바라보는 자책의 눈길을 거두라는 충고였다.  내가 스스로를 더 이상 문제 삼지만 않는다면 이미 나는 내가 원하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이걸로 충분한지’ 묻지 말고 오늘의 나, 오늘 가진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받아들이기, ‘이미 충분한’ 내 운명으로 남을 위해 사소한 순간 하나라도 아름답게 만들기, 한번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순례길에 연주를 하고 싶어서 키타를 메고 다니는 젊은이, 생일을 맞은 친구를 찾아 산티아고까지 오는 소꿉친구들, 침대에 누워 죽기를 기다리느니 길 위에서 죽는 것이 낫다고 하는 남아공에서 온 할머니들, 걷지 못하는 친구를 들것에 싣고 걷는 6명의 친구들... 사소한듯 결코 사소하지 않은 그 순간들이 바로 ‘살아있음의 경험’이 아니고 무엇이랴.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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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꼭 읽어 보고 싶습니다.
    주문 클릭하러 쌩~~~하고 갑니당..히힣

    언냐 감기조심하세요!!

    2009.05.19 23:5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예~~ 토댁님도 1인 몇 역을 하는 분이 아프시면 안되겠지요! ^^

      2009.05.20 01:01 신고 [ ADDR : EDIT/ DEL ]
  2. 비밀댓글입니다

    2009.05.20 00:00 [ ADDR : EDIT/ DEL : REPLY ]
    • 비밀댓글입니다

      2009.05.20 15:55 [ ADDR : EDIT/ DEL ]
    • 복합도 아니고 어느 한 쪽의 손을 들다니, 정말 의외입니다. 너무 독단적인 글이 아닌가 해서 은근히 신경이 쓰였는데, 우려였던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그럼 용기를 내어 온라인 서점에도 리뷰를 올릴까요? ^^

      2009.05.20 20:00 신고 [ ADDR : EDIT/ DEL ]
  3. 참.. 미탄님의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뚫어보는듯 합니다. ^^

    2009.05.20 00:55 [ ADDR : EDIT/ DEL : REPLY ]
    • 너무 균형감각이 떨어지고 제맘대로 쓰는 글이라 민망할 따름입니다. 깊은 우정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이누잇님의 리뷰는 정말 굉장했습니다.^^

      2009.05.20 01:14 신고 [ ADDR : EDIT/ DEL ]
  4. 주위 분들의 리뷰로 도저히 읽지 않고는 못배기도록 만드네요 ^^
    저도 곧 책을 펼쳐봐야겠습니다.

    2009.05.20 16:2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제 리뷰는 순전히 제 느낌 위주라서, 책에 대한 소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위 글도 고치고 싶은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지만, 그냥 넘어 가렵니다.^^

      2009.05.20 20:07 신고 [ ADDR : EDIT/ DEL ]
  5. 오랜만에 미탄님의 글에 댓글을 남깁니다^^ 글이 담백합니다. 딱 떠오르는 느낌이 담백이에요. 저는 산티아고 길을 직접 걷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던데 블로그 이웃 중에서 제가 첫 타자로 떠나버릴까요. :) 아직 학생이니 충분히 가능합니다만...

    2009.05.20 23:5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읽는 사람을 고려하기보다 늘 내 느낌이 우선인 내 글이 읽는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반응해주어서 고마워요. 우연히 이어서 서명숙의 산티아고에 대한 글을 읽고 있는데, 거기에서 비롯된 제주올레도 참 소중하게 다가오네요.
      상징성이 자꾸 쌓이니까 산티아고의 의미도 더욱 깊어지구요, 잘 지내지요?

      2009.05.21 11:24 [ ADDR : EDIT/ DEL ]
  6. 저도 오랜만에 댓글을 남깁니다. 전에 블로깅을 안하신다는 글을 읽은 이후 정말 안하고 계시는 줄 알았답니다 ㅡ.ㅡ

    산나님이 참 좋아하시겠습니다. 이렇게 멋진 서평을 써주시다니... 제가 책을 낸다면 이런 서평이 달릴 정도로 가치있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2009.05.21 06:52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블로그에 전혀 신경을 못 쓰는 것이 맞아요. 개인적인 글창고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블로그 이웃 분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잠수 들어간 것이 마음에 걸리던 차에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바쁘시겠지만 일상에 파묻히지 마시고, 늘 꿈을 따라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멈추지 않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믿고 있구요.^^

      2009.05.21 11:29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