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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19 낮술 (2)
좋은 삶/새알심2010. 2. 1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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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먹을 것이 너무 많다.  명절 지난 후 제일 천덕꾸러기는 전이 아닐까. 동태전이든 꼬치든 뜨거울 때 한 두 개 집어먹는 맛이지, 그 뒤로는 줄어들지가 않는다. 재빨리 한 뭉치를 얼렸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치면 그것도 못한다. 식욕이 사라진 음식을 얼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먹는 만큼 먹고 조금 버릴 수밖에 없다. 다행히 어제 전을 잔뜩 넣고 정체불명의 섞어찌개를 해서 많이 먹었다. 오늘 목표는 남은 만두속을 먹는 것이다


만두속이 대접으로 딱 하나 남았다. 아주 어정쩡한 양이다. 찌개에다 넣어도 되지만 부꾸미처럼 부쳐 먹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요리라고 부를 형편은 못되고 조리를 할 때에도 똑같은 음식을 싫어하는 기질 탓이다.  이런! 밀가루반죽이 너무 묽어서 만두속을 감쌀 수가 없다. 안그래도 잡탕인 만두속에 뭉개진 반죽이 섞여 요란하다. 여기서 말 수는 없지! 아예 만두속을 팬에 좍 깔고 그 위에 묽은 반죽을 부어버렸다. 전부 먹을 것만 넣었는데 설마 못 먹을 음식이 나오겠나 하는 배짱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들하고 나한테만. 아들은 아주 맛있게 먹어준다. 나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정체불명의 음식이 된 김에 치즈가루를 뿌려보니, 퓨전요리가 따로 없다.  도우 없는 피자요, 쌀 없는 리조또요, 되다만 또르띠야라고나 할까. 퓨전요리에 와인이 없을 수 없지. 마침 마트에서 세일하길래 사다놓은 와인이 한 병 있다. 대한민국 저가와인의 대표선수인 빌라M이다. 색깔변하기 시작한 바나나와 오래된 오징어도 불려나왔다. 졸지에 술판이 벌어졌다.


"와인은 왜 이렇게 성공하기가 어렵냐"고 투덜대며 아들은 조금만 마신다. ‘싼 거만 사니까 그렇지’ 속으로 말하고 만다.  와인은 마지막 잔이 맛있다. 싸구려 와인이라도 마지막 잔은 향기롭기 그지없다. 그 사이 공기에 접하여 맛이 변한 건지,  취해서 내 입맛이 변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알딸딸하게 좋아진 기분으로 마지막 와인을 아껴가며 책을 읽는다.  ‘스누피의 글쓰기완전정복’이다. 전에 분명히 읽은 책인데 새롭게 만난다. 내용과 형식이 고스란히 내 안으로 들어와 ‘내 인생의 책’에 한 권을 추가해준다. 연신 킬킬거리며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부분을 읽어 주는데, 나의 퓨전요리에 퇴짜를 놓은 딸이 만든 요리를 들고 온다. ‘생크림을 넣지 않고 크림스파게티를 만들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원래 목표는 알리올리오-아무런 소스를 넣지 않고 소금간만 해서 먹는 스파게티-였는데, 중간에 자신이 없어졌다고 한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마요네즈를 조금 넣었고, 이어서 우유를 넣어보았는데 이게 또 성공한 거다. 기분이 좋아진 딸이 “Ya! My Family" 하며 소리친다.


“젓가락은 각자 확보하시길!”

설거지를 안해서 젓가락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건 요리사의 기본이 아니지.”

내가 받아쳐보지만 소용이 없다. 내 말발은 언제나 딸에게 밀린다.

“프리랜서는 그래도 돼!”


먹고 마시며 웃다보니, 이게 행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슬며시 치고 올라온다.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생각에 요즘 살짝 우울했던 것이다. 적당히 풀어져서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앞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좋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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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고..언니가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하심 저는 우째나요?^^

    너무 즐거우셨겠어요.
    울 애들도 얼른 커 줬으면...ㅋ

    2010.02.19 20:2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잠깐이더라구요.^^
      품안의 자식이라는 말도 맞구요.
      지금 맘껏 사랑해주시기를!!

      2010.02.20 11:13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