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무언가를 깨우치는 것은 단속적인 유형을 따른다고 한다. 외국어습득이든 스키연습이든 거기에 들인 시간과 노력에 정비례하여 기량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 답보상태를 거친 다음에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는 것이다. 사분면을 대각선으로 가르는 1차 함수 그래프가 아니라, 계단을 떠올리면 되겠다.
학원을 운영할 때, 말이 아주 늦은 5살짜리 아이가 - 이름이 ‘환희’였다- 하루 아침에 말문이 터진 일이 있었다. 겨우 단어 몇 개를 떠듬거리던 아이가 완벽한 문장으로 그것도 수다에 가까운 빈도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경이로웠다. 그 때 언젠가 흘려 들은 ‘단속적 발전’이 떠오르며 철석같은 믿음이 되어 버렸다. 사실과 상관없이 믿음이란 이렇게 형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게 그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무슨 일을 시도할 때 섣부른 결과치를 기대하지 않고 꾸준히 불을 때게 만든다. 순간적으로 바닥면이 너른 계단이 떠오르니 내가 나를 설득하기도 좋다.
두 번째 책을 낸 뒤로 4개월, 이렇다 할 글을 쓰지 못했다. 내 안의 것을 얼추 퍼내어 새로운 물이 고일 시간이 필요했으며, 무엇이든 떠오르는 대로 글이 되던 초심자의 열정이 지나간 데다, 아프면 아프다고 울적하면 울적하다고 있는 대로 속을 보이기도 무엇한 튜터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내가 글쓰기강좌를 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글을 쓰는 일이 줄고, 글쓰기에 ‘대해서’ 떠드는 일이 늘어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앞날이 보였다. 이제껏은 비교적 자유로웠던 자기검열, 글 쓰는 데 가장 무서운 걸림돌인 그것이 늘어날 일 밖에 없었던 것이다.
창작 사이클이 한 번 지나간 것 같기도 하다. 연구원 이후 5년간 나는 거의 매일 읽고 썼다. 즉흥적인 성격대로 들쭉날쭉했지만 한 번도 글에서 마음이 떠난 적이 없었다.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 나는 두 권의 책을 쓸 수 있었고, 그러는 가운데 내 안의 자원이 고갈된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관심, 새로운 감흥, 새로운 열정이 필요하다! 지난 5년을 채운 것이 나다운 삶을 찾고자하는 몰입이었다면, 새로운 5년을 이끄는 것은 진짜 글쟁이가 되기 위한 프로의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내 감성을 살찌울 먹이는 좀 더 풍요로워야 하고, 내 표현력을 벼릴 도구는 좀 더 날카로워야 하고, 내 자세를 다듬어줄 조련사는 좀 더 냉정해야 할 텐데, 나는 이것들을 문학에서 가져오기로 마음먹었다. 실용서와 문학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문학에는 글쓰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경험과 성과가 쌓여 있으므로 어떤 글쓰기의 전범도 될 수 있다고 본다. 글쓰기의 젖줄이 문학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소설과 시, 수필을 100권쯤 읽어야겠다. 실용서를 써 본 경험을 가지고, 수강생들에게 어떻게 전달할까 튜터의 눈을 가지고 읽는 것이라 더욱 기대된다. 문학이라는 무궁무진한 저장고에 빨대를 꽂고 나니 백만 대군을 얻은 양 든든하다. 나는 여기에서 제2의 창작 사이클을 열어젖히는 데 충분한 자원과 에너지를 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삶 자체가 한 바탕 꿈으로 여겨지는 나이가 아닌가! 삶이라고 하는 재료를 종으로 횡으로 훑어보고 잘라보고, 회쳐먹고 요리하고, 부둥켜안고 사랑하며 처절하게 거부하는 문학에 푹 빠져서, 삶에 대한 초월 한 자락 배워 보련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넓고 평평한 계단이라도 오를 수 있겠지. 곧이곧대로 나를 드러내기 쪽팔리는 연배에 내 이야기에 즐거운 거짓말을 섞어 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다음다음 번 책은 성큼 문학으로 다가 선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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