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삶 그리고 철학'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1.07.26 장자읽기의 즐거움, 망각과 자유-강신주 (5)
  2. 2011.07.21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강신주 (2)
  3. 2011.07.16 강신주, '철학, 삶을 만나다'
  4. 2011.07.12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5. 2011.01.05 에브리맨 (2)

장자읽기의 즐거움, 망각과 자유  - 강신주


‘피리, 거울, 어린아이’의 공통점은? 셋 다 나를 비우고 외부와 접하는 대로 정직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속이 꽉 찬 피리는 소리를 낼 수 없듯이, 사람도 자의식으로 꽁꽁 뭉쳐 있으면 타자와 부딪혀 공명할 수가 없다.  거울 또한 이전에 비춘 대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더 이상 거울 노릇을 할 수가 없다. 과거에 어떤 모습을 비추었든 철저하게 지금 마주친 존재에 반응해야 거울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는 모든 것을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시선으로  본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십자가에서 인공위성까지 모든 것이 장난감이다.


장자에 대한 강신주의 책을 두 권 째 읽는다. 얇지만 복습효과가 커서 좀 더 울림이 크다. 어렵고 장엄하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던 장자가 이렇게 쉽고 재미있는데다가 내게 꼭 필요한 내용일지 몰랐다. 스승이든 사람이든  준비가 되면 나타난다고 했던가, 책도 그런가 보다. 강신주가 읽어주는 장자는 그야말로 ‘소통’의 화신이었다. ‘소통’과 요즘 유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은 다른 것이라고 그는 거듭 강조한다. 막혔던 것을 터서<소> 물 같은 것이 흐르도록 연결하는 것<통>이므로 자못 혁신적이라는 얘기다.

오랫동안 무언가를 공동창작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해 왔다. 양인자, 김희갑 부부가 단지 금슬좋은 부부였다면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보통 부부가 공유하는 것 말고 또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아내가 가사를 써 놓으면 남편이 작곡을 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자기 심경을 잘 표현했는지 놀라울 정도라는 양인자의 말이 잊히지가 않는다.  ‘알고 싶어요’, ‘립스틱 짙게 바르고’, ‘킬리만자로의 표범’ 처럼  가사에 착 붙은 선율로 명품이 된 가요들이 그녀의 말을 증명해 준다.  그리고 릴케와 로댕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이상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생각뿐  내 이상을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해 본 적이 없다. ‘혼자’ 하는 일에는 약간의 노력이나마 하고 있지만 ‘함께’ 하기 위해 자의식을 죽여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내가 그렇게 부러워하던 이상의 초입에 들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서로의 창조성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서로의 창작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거나 아예 무언가를 공동창작하는 사람들이 제일 부럽다고 노래를 해 왔는데! 이제 이상을 실험하는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피상적인 노래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집요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을 때, 장자 아니 강신주가 내게로 왔다.

성인의 도로 성인의 재주가 있는 이에게 알려주는 것 또한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알려주고서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삼일이 지나서 ‘천하’를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가> 이미 ‘천하’를 잊어버린 후 나는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칠일이 지나서 ‘외부대상’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가> 이미 ‘외부대상’을 잊어버린 후 나는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구일이 지나서 ‘삶’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이미 ‘삶’을 잊어버린 후 <그는> 조철朝徹할 수 있었다. 조철한 후에 <그는> 獨을 볼 수 있었다. 독을 본 이후에 <그는> ‘고금’을 없앨 수 있다. (...) 이런 사람은 타자에 대해 마중하고 맞이하며 훼손하고 이루어주지 않음이 없다. 그것을 일러 영령攖寧이라고 한다. 영령이란 타자와 복잡하게 얽힌 뒤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


‘조철朝徹’이란 아침에 여명이 터지는 경관을 말하니, 조철의 상태에 이른 마음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그 존재성에 입각하여 바라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

 

‘견독見獨’은 자신의 유한성을 철저하게 자각하는 상태이다. 자신의 생각만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유아론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고금을 없애다’의 뜻은, 어떤 기억도 담아두지 않고 어떤 기대도 하지 않음으로써 , 시간의식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시간의식을 제거한다면 타자와 조우할 때 그 결에 맞추어 마중하고 맞이하며 훼손하고 이루어주지 않음이 없게 된다. 이처럼 타자와 소통하고 공존하는 상태를 ‘영령攖寧’, 얽혀서 안정된다는 뜻이다.


나는 전에 자기확신이 강한 것이 자랑스러웠다. 정혜신이 만 명 이상을 만나 심층상담을 해 보니, 진짜 자기확신이 강한 사람이 희소하더라는 이야기를 할 때 은밀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나의 확신은 오직 나 하나를 위한 것이었다. 내 영토의 신민은 오직 한 사람 나 뿐이었다. 고의는 없었지만 급한 성격에 수시로 내 잣대를 휘두르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독불장군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타자의 비중이 나이와 비례하여 커진다 싶었을 때,  나의 확신이라는 것이 외부와 얽히며 검증되지 않은,  ‘타자가 배제된 유아론적’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러니 ‘견독’까지는 온 셈인가? 이제 주위 사람을 내 판단이 아닌, 그 사람 고유의 존재성에 입각해서 바라봐줘야 할 도전을 느낀다. -내 감각으로는 ‘견독’ 다음에 ‘조철’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이것이 이루어져야만 나의 오랜 꿈인 ‘영령’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타자와 복잡하게 얽힌 뒤 이룬다!’ 는 대목에서 장자의 현대성을 느낀다.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단어 idiot의 어원이 ‘혼자 지내다’인 것것처럼, 혼자는 의미가 없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어울려 서로에게 가치있는 것을 이루는 것이 삶의 최대 의미인 거고, 이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여기로 가기 위한 장자의 처방은 오직 하나, “잊어라! 그리고 연결하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만나고자 한다면, 판단력과 선입견, 자의식을 버리고 피리처럼 속을 비우라는 말이다.  어제까지 그에게 가졌던 느낌 같은 것 말갛게 지워버리고 ‘지금, 여기’ 모습 만을 거울처럼 비추라는 것이다. 지나친 의미중심, 목표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아이처럼 모든 것을 놀이로 대하라는 말이다. 이처럼 나를 비우고, 나를 죽일 때 새로운 내가 탄생하고, 새로운 관계구성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만한 이해와 신뢰로 동앗줄처럼 꽁꽁 얽힐 때 무슨 일이고 가능하지 않겠는가. 아하! 나는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사람들이 그토록 자기를 찾기 위해 애쓰는 것은 자기를 버리기 위해서인가 보다. 나를 세워라, 그리고 나를 버려라! 장자를 읽다가 득도하려나 보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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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말 좋은 포스팅인 것 같아요. 지금의 저에게도 굉장히 와닿는 말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참 어려운 것이 '함께'하는 일 같아요.. 아집도 많고 부족함도 많은 인간인지라 저를 잘 알고 넓은 마음으로 잘 받아주는 주변의 몇몇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부닥치기도, 융화하기도 하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랑은 안맞는 것 같은 느낌의, 말투의, 생각의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대해야 하는건지... 그들과도 기분 좋게 잘 지낼 수 있는 것이 '영령'인 걸까요? 모두에게 노력이 있다면 언젠가는 가능한 일인게 맞는 걸까요? 상대도 내가 맘에 들지 않고, 맞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잘 지내고자 각자가 서로를 그냥 인정해버리고 지낸다면 가능도 하겠지만... 어느 한 쪽이 그러한 마음이 아니라면.. 또 다른 한쪽이 그냥 참는 일로만 끝나는 건 아닌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개선될 수 없는 관계라면, 그냥 피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참 어려운 것 같아요..ㅠㅠ

    2011.07.27 16:04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하하, 지금 심리다독님이 써 준 말이 정확하게
      내 심경하고 똑같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봐도 되겠네요.

      생각을 조금 더 해 보자면
      나를 잘 받아준 사람도 내가 꼭 이쁘고 자신과 잘 부합해서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이 자신의 스타일이나 포용력 덕분에 내가
      편해진 것을 생각하면,
      내가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너비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뭐 그 정도 생각이고,
      나이들면서 눈곱만큼씩 ^^ 나아지고는 있지만
      내게도 여전히 이론입니다요.

      2011.07.28 06:39 [ ADDR : EDIT/ DEL ]
  2.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저도 참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예요. 남이 해놓은 일은 내 성에 안차기에 혼자서 하고마는. 그러다 보니 십칠년을 같이 산 아내와도 아직 벽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아내의 모습속에 인정하지 못하는 부분이 남아있는 거죠. 모든 이를 존재성에 입각해 바라보는 것. 매번 생각하고 바꾸어야지 해도 잘 되지 않는 일입니다. 저도 장자를 읽어봐야겠습니다 ^^

    2011.08.12 23:45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와우!! 쉐아르님, 잘 지내시지요?
      블로그를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나이에^^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마냥 오픈할 수도 없어 어정쩡한데
      쉐아르님의 등장은
      예전에 좋았던^^ 시절을 불러일으켜 참 좋네요.

      장자도 문학적 텍스트라 해석이 중요할듯해요.
      강신주의 관점 괜찮더라구요.

      2011.08.13 11:17 [ ADDR : EDIT/ DEL ]
  3.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망각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겼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책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2019.03.28 17:2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강신주


“원장님은 열 번을 만나도 처음 보는 사람 같아요.”


오래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확한 표현이다. 나는 모든 것을 낯설게 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나 자신과 내 자식들마저 객관적으로 살펴보는데 능하니, 제3자는 말해 무엇하랴!  철학이 삶을 낯설게 보는 것이라는 풀이에 접했을 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면 나도 이미 하고 있던 거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해였다. 그것도 부끄러울 정도로 완벽한 오류였다.  강신주의 책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론으로 읽힌다. 삶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철학이라면, 우리 삶 자체가 거의 무한에 가까운, 타자와의 연속적인 만남이기에 타자란 가장 심각한 철학적 문제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는 타자가 배제된 담론을 유아론적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연히 남들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무심한 습관으로부터, 공동체의 규칙을 절대화하는 시도까지 모두 포함된다.

사실 우리는 관계 때문에 얼마나 자주 부대끼는가? 너무 계산이 빠르고 걱정이 많아서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은 딸과, 반대로 너무 물정을 몰라서 천진무구하기 이를 데 없는 아들을 비롯해서 너무 세속적이거나 에너지가 약하거나  완벽주의인 사람들에게 내가 느낀 불편함은 나와 같지 않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던가? ‘타자가 배제된 담론이 유아적’이라는 한 마디에 나는 초반부터 세게 얻어맞는다. 왜 그들이 나와 같아야 하는데?  나의 혼자놀기는 타자와의 차이를 수용하지 못한 편협함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강신주는 이런 편협함이 위대한 형이상학에도 적용된다고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하이데거의 존재, 노자의 도, 주희의 태극’이 ‘그리스의 폴리스, 게르만의 전원생활, 중국의 고대국가, 유학의 가부장제 사회’라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규칙을 절대 불변의 진리로 고착화하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삶을 조망할 수 있게는 해주지만 여전히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성격을 갖는 정신적 지평을 유일하고 절대적인 지평으로 간주하는 것은, 마치 이 세상에 여행지라곤 단 한 곳밖에 없다는 식의 병적인 발상이라고 그는 질타한다.

장자는 이런 시도들이 주는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다고 한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이것이 강신주가 해석하는 장자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장자 개인이 쓴 것이 아니다. ‘내편’은 비교적 장자의 사상이라고 여겨지지만 그조차 여러 차례 편집된 것이고, ‘외.잡편’은 장자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은 후학들에 의해 이루어진 논문집의 형식이다. 그렇기에 ‘장자’ 곳곳에는 역대 편집자들의 주석을 비롯하여, 장자 본연의 사상과 구별되는 경향이 두터운 먼지처럼 끼어 있다. 그래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떤 흐름을 붙잡느냐에 따라서 180도 다른 해석도 가능한 터이고, 나는 강신주가 읽어주는 장자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도 이것을 몇 번이나 강조한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을 일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해석한 연구자들이 많은데, 이것은 장자를 신비주의자로 만드는 치명적인 오독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내가 장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무위’ 혹은 ‘거침없는 초월’ 정도였다. 그러나 강신주가 말하는 장자의 꿈이란, 타자가 배제된 사유 즉 유아론에 불과한 형이상학적 사유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꿈에서 깨어나야만 한다는 주장은 타자를 관조의 대상으로 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어떤 타자와도 직대면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관조의 세계와는 달리 삶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수한 타자들과 마주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자의 서막을 장식하는 유명한 ‘대붕’이 구만리까지 상승하여 내려다 본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아래 땅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먼지가 날리며 생물들이 서로 숨을 불어 주고 있구나.


생물들이 서로 숨을 불어 주고 있구나. 이 부분이 가만히 가슴으로 들어 온다. 장자는 초월주의자가 아니었다. 반대로 어떤 초월적인 가치에도 현혹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했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도道가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어 기를 쓰고 찾고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파악한 반면 장자는 ‘도는 걸어가야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 말은 상당히 선동적이고 현대적이다. 어떤 위대한 사상이나 유용한 조언도 내 발걸음으로 확인해야 내 것이 된다는 말이다. 관념적이고 학문적인 탐구로서가 아니라, 실천하는 가운데 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작은 봉우리 하나에 도달했다고 해서 결코 끝이 아니며, 부단한 자기극복 혹은 경계의 횡단으로 읽어도 좋다.


또 이 말은 ‘타자와의 연속적인 만남’을 뜻하는 것으로도 보이니 해석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아무튼 나는 강신주가 읽어주는 장자가 좋다. 장자가 공자의 말을 빌려 하는 말을 들어보자. 공자가 제자 안회에게 하는 말이다.

네가 위나라에 들어가 그 새장 안에서 노닐 때, 이름 같은 데에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받아 주거든 유세하고 받아주지 않거든 멈추어라. 문도 없애고 언덕도 없애서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부득이한 일에만 깃든다면 괜찮을 것이다. ... 너는 날개가 있는 것이 난다는 것을 들어보았겠지만, 날개가 없이 난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너는 앎으로써 안다는 것은 들어보았겠지만, 알지 못함으로써 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 인간세


문도 없애고 언덕도 없앤다는 표현에 깜짝 놀란다. 타자와 부딪치는 장면마다 어떤 선입견이나 판단을 하지 말고 오감을 열어놓고 반응하라는 말로 들린다. 미세한 판단이 쌓여 급기야 마음문이 닫히는 경험을 우리는 얼마나 오래 해 왔던가! 그래봤자 그 판단이라는 것은 얼마나 사소하고 이기적이며 그나마 확인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는지! 마음을 비우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한다면 얼마든지 새로운점을 발견할 수 있고, 그로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알지못함으로써 안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강신주는 이렇게 풀이한다.  문이란 타자에게로 이르는 유일한 통로를, 언덕은 먼 곳을 조망하기에 좋은 높은 장소를 의미, 문이나 언덕은 어떤 초월적 지평을 상징. 부득이-내가 멈출 수 없는 것 즉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바꿀 수 없는 타자성을 상징하니,  타자를 읽으려는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타자에 몸을 맡기는 방법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으면 타자가 아니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도 타자가 아니다. 어떤 연결도 매개도 존재하지 않기에 타자인 것, 그런 타자와 소통할 수 있다면 날개가 없이 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 조화롭고 즐겁도록 하고 타자와 연결하여 그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밤낮으로 틈이 없도록 하여 타자와 더불어 봄-春-이 되도록 해야 한다.


타자와 더불어 봄! 이것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희열이요, 내게 부과된 최고의 도전인 것을 알겠다. 이것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내 삶이 충만한가 아닌가가 결정되니,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 현대철학의 쟁점이 ‘타자와 차이’라더니 2천 년 전의 장자를 이런 관점에서 읽어낸 강신주가 대단하다. 계속해서 책도 읽어 보겠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비우고 사람을 대하는 시험에 나를 들이밀어야 할 것 같다.  잊어라! 그리고 연결하라!  저자의 메시지를 깊숙이 안고 가는 것이, 좋은 책을 써 준 저자에게 건네는 감사의 표시이리라.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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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삼 장자를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글!

    2011.07.22 13:44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잘 지내지요?
      저는 장자는 물론 철학책도 맘먹고 처음 읽었는데
      아주 좋아서 출발이 좋네요~

      2011.07.23 11:16 [ ADDR : EDIT/ DEL ]




인문학은 질문하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론과 선례와 정신적 물질적 여건과 상상력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다. 인문학의 꽃인 철학은 온몸으로 이 질문들의 포화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마냥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던 철학에 드디어 손이 가다.


이 책은 내가 철학입문서에 기대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쉽고 친절한 문체로 철학이라는 거대한 몸통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워준다.  두께도 적당하고 목차는 명료하다. ‘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로 이루어진 구성이 만만해 보여 빨리 읽고 싶어진다. 이것도 재능인데 그러고 보니 이 저자의 책 제목이 뛰어난 것이 많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상처받지 않을 권리’,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모두 읽고 싶은 생각이 확 들게 만드는 제목들이다.


우선 저자는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며 1부를 시작한다.  철학은 삶을 낯설게 보는 것이란다. 왜 그래야 하느냐면 어차피 삶이란 서서히 낯설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에, 훗날 맞부딪칠 불편과 당혹에 대비하여 미리 삶을 낯설게 해 주는 것이 필요하단다. 하긴 모든 것이 변하고 흘러 간다. 천사같이 방싯거리며 웃던 아기가 괴물처럼 자글거리는 주름살로 뒤덮인 노파가 되고, 한 때 분신같던 사람들이 얼마든지 남보다 더 멀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죽음이라는, 그야말로 낯선 경계를 넘어가야만 한다. 보통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떠올렸다가도 잊어버리지만 철학자들은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통해 프레임 하나씩 마련한 사람들이다.  이어 철학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입장- 우발성과 필연성에 대한 설명도 쉽고 설득력있었다.


2부에서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인 사랑, 가족, 국가, 자본주의 같은 것들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소개한다. 삶과 떨어진 철학은 공허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극히 일상적인 주제를 가지고 철학적 사조를 소개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강신주는  뛰어난 저자들이 흔히 그렇듯 예화사용의 명수이다. 가족의 의미를 뒤집기 위해 거론된 카프카는 섬찟하고, 국가주의의 허상에 빗대어진 스톡홀름증후군은 탁월하다. 요소요소 꼭 필요한 곳에서 인용된 철학자들의 기본개념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좀 더 알고 싶어진다. 이름만 들어도 아득했던 들뢰즈 조차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들뢰즈 못지 않게 이상한 이름을 가진 가라타니 고진도 확실하게 기억해 두었다.


저자는 철학이 고유명사의 학문이라고 한다. 저마다 자신의 프레임으로 본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짧게짧게 소개된 철학자들만 보아도 알겠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자신의 어법으로 펼쳐보이고 있었다. 그 많은 철학자들의 개념이해만 하기에도 벅찬 일이겠다. 그러나 철학의 목적은 제아무리 뛰어난 철학자라 하더라도 답습하고 추종하는 것이 아니고, 될 수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갖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만의 능선에 올라 자신만의 정상을 발견하기 위해 자기 삶을 스스로 채찍질하는 일! 그는 말한다. 삶에서 가장 필요한 건 자기욕망이라고.


3부에서는 불교와 놀이와 타자에 대해 가벼운 소개를 하고 있다. 현대철학의 주요 주제가 ‘타자’와 ‘차이’라는 것이 땡긴다. 이렇게 한 발을 딛었으니 다음에는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함축적인 문장 하나만 옮겨보자. “홀로 있는 사람은 의미가 없다.”


에필로그도 아주 인상적이다. 책의 서두였던 ‘낯설게 보기’를 다시 가져와서는, 우리가 삶을 낯설게 보는 이유는 우리가 넘어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넘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고, 우리 삶과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이기 때문이다. 나도 자주 해 보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그가 콕 박아 준다.


얇지만 실속있게 꽉 찬 책을 읽은 것이 고마워서 인터뷰 기사를 하나 찾아 보았다. 투박하고 듬직해 보이는 얼굴이 거리의 철학자답다. 고1때 지리산에 가서 은하수를 보고, “삶이 참 작은 거구나” 생각했던 경험이 자신을 철학으로 이끌었단다. 그 때부터 삶을 낯설게 본 셈이니, 철학의 시작은 ‘클리나멘’을 잡아채는 것이련가!

 


인터뷰 ‘정재승이 만난 사람- 강신주’

http://www.yes24.com//chyes/ChYesView.aspx?cont=6029&title=0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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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두 권 쓰고 나니 제대로 된 독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과 함께 책임감이 몰려왔던 것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독자들이 접하기 어려운 책을 읽고 안내하거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역할도 있을 터이니, 앞으로는 조금 딱딱하더라도 심도있는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을 때, 처음으로 떠 오른 분야가 철학이었다. 그야말로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 당도한 셈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요한 철학자 48명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철학자 한 명당 세 장을 할애했으니 결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게다가 거의 모든 꼭지를 아주 쉬운 예화로 시작하고 있어 술술 읽힌다. 그러니 작정하고 철학입문서를 쓴 것 같다.  그것이 이 책의 특징이요 존재이유인 만큼 대단한 이론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막막하게만 보이던 철학이라는 봉우리를 일별할 기회를 준다고 할까, 철학의 난전이라고 할까, 제목에서 풍기는 포스만큼은 못 한 것도 사실이다. 어렵지않게 읽은 것은 고맙지만, 일말의 서운함도 없지 않던 차에 끝부분에서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


저자는 자신이 소개한 48가지의 목소리 중에서 독자의 삶을 흔들어놓는 한 두 가지 목소리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나는 너무나 소박한 기대치에 살짝 놀라는 동시에, 책이란 것의 역할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제껏 나는 온 몸으로 감응하는 책이 아니면 별 의미가 없다고 밀쳐놓곤 하였다. 이런 태도 때문에 책을 너무 가려 읽느라, 나의 지식흡입력이 위축되었는지도 모른다.  48명의 철학자 중에서 한 두 명만 만날 수 있어도 성공이라는 발상의 전환은 기분좋았다. 그로써 철학이라는 분야에 자연스럽게 다가설 수 있고, 그 한 두 명을 통해 좀 더 본격적인 탐구가 이루어질 터이니 이 아니 좋은 일인가!


그제서야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책 뒤에 붙여진 여분의 추천도서 목록도 아주 요긴했다.  연달아 그의 저서 몇 권을  읽어 볼 요량이 들었으니, 이렇게 나는 ‘강신주’라는 저자와 접속하게 된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곳은 두 군데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의 자는 현덕玄德이다. 玄은 ‘검다’는 뜻이다. 또한 덕德은 득得이다. 득에 마음 심을 더 한 것이 덕이기에, 덕은 마음까지 잡아둘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단순히 도덕적인 품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덕이라면 탁월한 신하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고, 스승의 덕이라면 탁월한 제자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또한 유비는 노자의 ‘도덕경’을 통해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만 한다. 이것을 ‘은밀한 밝음’이라고 한다”는 통치개념을 익혔다. 상대방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주는 속내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노자의 가르침을 받들어 玄德 이라는 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유비가 신하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가는 책에서 직접 보라. 자칫 술수로 볼 수도 있지만,  신하의 마음을 얻기위해 이만한 전심을 기울이는 통치자라면 마음을 얻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무심히 알고 있던 玄德에 숨어있는 의미를 알게 된 것도 아주 흥미로웠다. 바로 이것이 공부하는 맛이리라.


두 번 째로는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가 눈에 띄었다. K-POP이 유행과 멋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선풍을 일으킬 정도로 우리나라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활황을 이루고 있고, 갈수록 리얼리티 쇼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고 있다. 쇼나 방송을 보면서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고도의 상술 아래 기획된 프로그램을 일방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점, 직접 나서서 삶을 체험하는 것보다 리얼리티 쇼를 시청하는 것이 더 재미있고 의미있다면 큰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내게 ‘스펙터클의 사회’는  시의적절했다. 스쳐가는 생각을 사회적, 철학적 문제의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레퍼런스를 제공해 준 것이다.


스펙터클은 글자 그대로 황홀하고 매력적인 볼거리를 가리킨다. 발달한 대중매체는 대중매체 속의 이미지들을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일종의 착시효과가 생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자연 재난이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 결국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에 길들여짐에 따라 스펙터클 사회의 거주민들은 점점 현실에 대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변하게 된다. ... 스펙터클 사회는 인간으로부터 상품에 대한 시각적 감각을 제외한 일체의 현실 감각을 박탈해 버린 거대한 매트릭스에 지나지 않는다.


강신주는 이 책을 마르크스로 끝맺으면서,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만이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모든 후손을 껴안는 것이 ‘진보’라고 못박고 있다. 겨우 철학 책 한 권 읽은 느낌으로 볼 때도, 좋은 철학이란 후대를 생각하는 미래지향성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저 코 앞에 닥친 문제, 발 밑의 어둠에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문제를  내 문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확장성! 이것을 토대로 다시 내 삶을 들여다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 지가 보이리라.  서서히 시야가 넓어지는 것을 보니 내가 철학 책을 제대로 읽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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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 에브리맨, 문학동네 2009


대단한 소설을 만났다. 이 작가의 칼날은 아주 성능이 좋다.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꽤 복잡하고 두터워 보이는 지층의 단면을 싹둑 잘라 보여준다. 거기에서 서늘한 금속성이 느껴진다. 과도한 연민이나 회한으로 주절주절 늘어놓지 않고, 인생의 맥을 짚어 단칼에 끊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라고 지칭된다. ‘그’는 우리 모두와 닮은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 즉 ‘에브리맨EVERYMAN' 이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뉴욕의 성공한 광고인이며, 세 번 결혼하여 세 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그’ 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여 행했던, 애정도 자부심도 없는 첫 결혼에서 빠져나와, 진짜 사랑했고 헌신적이며 유능한 두 번 째 아내를 배신하고 자기 나이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모델과 놀아난다. 내가 잘 나가는 백인남자였더라면 그와 똑같은 수순을 밟았을 것 같다. 그와 내가 남달리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보통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빠질 수 있는 함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보통 사람이 거치게 되는 인생경로에 대해 철저한 연구를 한 것 같다. 주인공의 선택과 행동, 기대와 심리묘사 어느 것을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건뿐만 아니라 주변인물들도 꼭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 같은 실감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 시대의 평균적 인간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를 소설 형식으로 썼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그는 서른넷에 두 번 째 결혼을 하고, 쉰 여섯에 심장수술을 하며, 예순다섯에 해변에 있는 은퇴자 마을에 입주하여 오랜 꿈이던 그림을 시작한다. 그림은 그가 예상한 기쁨을 주었지만 심장병으로 인해 모든 것이 서서히 사라진다. 그는 점점 한 시간의 산책과 30분간의 가벼운 수영 외에는 하는 일이 없는 노인이 되어 간다. ‘소중히 여기던 평화와 고요도 스스로 만들어낸 고독한 감금의 형식이 되어버리고, 그는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에 시달린다. 목적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한 때 그의 인생은 완전했다. 두 번 째 아내인 피비와 함께 만을 가로질러 헤엄을 치고, 사람들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사랑을 나누고,  바위에서 저녁으로 먹을 홍합을 걷어 집으로 돌아오던 때, 그리고  ‘늘씬한 작은 어뢰처럼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헤엄치던 어린 시절. 그는 보석상의 아들답게 이토록 아름다운 수사를 남긴다.  


여름의 매일매일 살아 있는 바다에서 타오르던 그 빛이여, 그것은 눈에 담을 수 있는, 엄청나게 크고 귀중한 보물이었다. 마치 아버지의 이름 머리글자가 새겨진 보석상 루페로 귀중하고 완벽한 행성 전체를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고향을, 십억, 조, 천조 캐럿짜리 행성 지구를!



그는 종전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을 가지고 수술실로 들어갔지만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에브리맨’이 가야하는 길로 가고 만 것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색다를 것이 없다. 미국에 사는 한 중산층 남자의 일생 특히 나이들고 병들어 죽기까지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저자의 숙련된 솜씨가 이 오래된 주제를 코앞에 바싹 들이댄다. 일부러 외면하기도 하고, 더러 잊어버리기도 하는 ‘절대적인 소거’를 두 번 다시 제쳐놓지 못하게 만든다.


단 한 줄의 문장도 허투루 쓰인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완벽한 계산아래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진다. 그의 장례식에서 피비는 “그가 만에서 헤엄치던 것만 보여요”라고 회고한다. 단지 그 말밖에 하지 못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장면은 두 사람에게 ‘살아있음’의 정수였던 것이 나중에 드러난다. 피비와 헤어지는 장면은 단 두 장으로 처리되었다. 그것도 그의 변명 세 마디를 제외하고는 모두 피비가 한 말로 채웠다. 저자는 이 짧은 지면을 통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여자의 심경을 대변하고, 외도로 인해 완벽한 결혼을 깨는 철없는 남자의 생리를 묘사하고, 앞으로 그 남자가 처하게 될 난국까지 예고한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1 센티미터씩 사라지는 것을 다 지켜 보았다. 아버지의 관을 흙으로 덮는 것을 보며 남긴 문장이다.  살아있는 내 몸 위로 조금씩 흙이 쏟아지듯  진저리가 쳐진다.


정교하게 빚어낸 인물들을 그처럼 함축적인 문장으로 묘사하다보니 장면들이 다 보이는 것 같다. 그는 형을 거의 신격화할 정도로 믿고 숭배했었다. 그랬던 그가 병원 문턱에도 가 보지 않은 형의 건강이 부럽고 질투가 나서 형과 멀어지는가 하면,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딸과 함께 살고자 한 계획이 무산되는 것 모두 낯설지 않은 정황이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그런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은 엄정한 각본이 날렵한 문장에 실려 모든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한 편의 시나리오다.


저자의 그런 능력 때문에 ‘에브리맨’은 섬찟하다. 역자의 말처럼 무슨 장치나 꾸밈이나 특수효과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렇다. ‘절대적인 소거’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해도, 어떤 호기심도 나를 달구지 못한다는 노년에 대한 두려움이 부쩍 커졌다. 동시에 저자가 행간에 숨겨놓은 메시지 또한 강하게 다가온다.


“저는 일흔하나예요. 당신네 아들이 일흔 하나라고요.”

“좋구나, 네가 살아 있구나.”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되돌아보고 네가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속죄하고, 남은 인생을 최대한 활용해봐라”


그의 독백에 대꾸하는 돌아가신 부모님, 그리고 살아계실 적 아버지의 입을 빌려 저자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


1933년생인 저자는 74세인 2006년에 이 작품을 썼다. 생존 작가 중 유일하게 Library of America에서 결정판을 출간하는 작가라고 한다. 작품 속의 ‘그’는 일흔하나의 나이에 숱한 무력감과 이질감에 시달렸다. 그러니 저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에브리맨’의 숙명을 거슬러가는 셈이다. 나도 저자처럼 살아있는 한 내 몫의 힘을 갖고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 이 천조 캐럿짜리 행성 지구에서!  그러기 위해서는 글쓰기가 그중 강력한 도구이니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글을 써야겠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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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른 퀴리

    에브리맨-소설, 급 땡기네요....
    소설이 맘에 와 닿게 읽어지지 않았었거든요!
    새해, 복 많이 만드시구요, 받으시구요...

    새책^^ 언제 서점에 쫘~악 깔리나요?

    2011.01.05 17:21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예~~ 맘먹고 소설 좀 읽으려고 해도,
      마음에 콕 와 닿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 책은 정말 제 스타일이었어요.

      자꾸 눈높이가 높아져서 두번 째 책은 천천히 빨리^^
      쓰려구요.
      푸른 퀴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원하는 삶에 성큼 다가서는 한 해 되기 바래요.

      2011.01.05 19:24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