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나는 달걀배달하는 농부, 나무를 심는 사람들, 2013

 

 

신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는 존재라면 농부는 신의 손이다

- 마하트마 간디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3년간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2001년 고향인 순천으로 귀농했다. 1961년생이니 올해 55세이고 귀농한 지는 15년이 넘어 책 속에 보이는 모습은 여느 농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학벌부터 거론하는 마음이 편치가 않다. 잠시 망설이다 그대로 서두를 잡는다. 학벌지상주의를 부추기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서울대가 갖는 희소성, 상징성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서다. 나도 어깨 너머로나마 농사를 겪어보았기에 그 힘든 일을 안 해도 되는 사람이 누구보다 더 잘 해 내는 것이 감격스러운 것이다.

 

전교조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의 퇴직에는 좀 더 본질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 같다. 책 속에 드러난 사고가 어찌나 깊고 단단한지 가히 철학자의 눈매와 사색을 방불케하기 때문이다. 우선 농사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들어보자. “세상의 수많은 직업 중에서 특히 농사일은 정성과 사랑으로 보살피지 않으면 좋은 수확을 얻을 수 없다. 농부는 작물을 보살핌으로써 그 결과물로 다시 가족과 이웃을 보살피는 이중의 의미를 안고 사는지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생명을 북돋는 존재가 된다. 그럼으로써 지상에서 신의 일을 대행한다.” 그러면서 서두의 저 구절을 딱 인용해 놓았는데 이 사람 진짜구나 싶다.

 

농부다운 농부, 진정한 직업인을 보는 마음이 고마울 정도이다. 이런 진짜 직업인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시절인가그가 떠나 온 교단만 해도, 교사이고자 할수록 상처를 받는 것은 아닌지정치판은 쳐다보기도 싫어 투표를 안 한 지 오래지만 정치가 우리네 삶에 갖고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알기에 생각하면 가슴만 갑갑하다. 이런 세태에서 근본 중의 근본인 농사의 의미를 알려주는 농부가 마냥 고맙다. (그는 정부가 추진하는 유기농 기준을 얻기 위해 자신의 농사를 짜맞추고 싶지 않다고 한다. 보통은 인터넷 직거래를 선호하기가 쉬운데 그는 그것이  효율만 추구한다며 서로가 잘 아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여 서로 살리는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한다. )

그는 양계를 하여 일주일에 두 번씩 순천과 벌교의 300세대에 달걀을 배달하고, 2천 평의 농사를 짓는다. 농사를 지으면서 느끼는 생동감에 대해 써 놓은 부분을 보면 그가 천생 농사꾼인 것을, 뇌가 아니라 뼈로 농사를 인식한 듯 하다는 아버지 세대의 농사꾼에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비온 뒤 굳어 버린 땅을 뚫고 올라오는 무순의 놀라운 힘, 풋고추 중에서 처음으로 갈색을 띠며 익기 시작하는 첫 번째 고추의 변색과 잘 익은 고추들의 선홍색 광채, 물에 후줄근하게 젖은 몸으로도 기어코 껍질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의 투명한 살색 부리와 발가락, 태어난 지 두세 시간 된 송아지가 일어서 보려고 몸부림칠 때 흔들거리는 네 다리와 하얀 앞니 두 개, 암탉이 알을 낳으면서 전신의 힘을 쏟느라 내는 신음 소리, 때 이른 서리를 맞고 뜨거운 물 뒤집어 쓴 모습을 하고 있다가 햇빛을 받아 다시 파랗게 본색을 되찾고 마는 김장 배추와 무, 폭우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버텨 준 논두렁 등등. 날마다 계절마다 메뉴를 바꿔 가며 펼쳐지는 생명의 향연에서 나는 힘들 때는 많지만 권태를 느낄 틈은 없다.”

 

이 많은 일을 하며 글은 또 언제 쓰는지, ‘참새처럼 너무도 사소한 글감을 가지고 펼쳐놓는 사유의 깊이가 감탄스럽다. 그 중 백미는 김계수유기농달나무농장의 거리.

 

그가 자신의 농장을 달나무농장이라고 이름지어 홍보 전단에도 넣고 그랬는데, 한 친구가 김계수유기농이라는 식으로 무조건 실명을 넣으라고 강하게 권유했다. 사람들에게 쉽게 기억되고, 신뢰감을 줄 수 있다는 논지인데, 그는 자신의 일처럼 배려해주는 친구가 고맙지만 끝내 달나무농장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그 변이 어찌나 사려깊고 문학적인지 한 번 들어보시라.

 

그 첫째 이유는

어떤 일이 자신과 사회에 아무리 큰 의미를 갖는다 해도 그 일을 하는 본인 스스로 즐겁지 않으면 다른 어떤 사람도 즐겁게 만들 수 없을 것인데.... 나는 이름이라는 재갈을 입에 물고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 둘째 이유는

들일을 하다 보면 온종일 햇볕이 드는 곳보다 은근히 그늘이 드는 곳의 흙이 부드럽고 촉촉해서 생명이 나고 자라기에 참 좋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햇볕에 너무 많이 오래 드러나 있으면 색이 바래거나 쉽게 시들고 바스러져 본래의 제 모습을 간직하지 못한다. 사람의 이름도 수많은 이들의 따가운 시선에 계속 드러나 있을 때 그 본성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나는 달나무농장이라는 나뭇잎 뒤에 살짝 숨어 그것이 바람결에 팔랑거릴 때마다 아주 자연스럽게 햇볕을 받으면서 일하고 싶다.

 

저자가 밝힌 이유 말고도, ‘김계수유기농보다는 달나무농장이 훨씬 아름다운 표현이라는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그 정도로 저자의 문학적 감각이 뛰어나다. 이만한 토대 위에 사회적 신념 또한 강력하니, 그가 협동조합을 만들어 <순천광장신문>을 격주로 발행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리라. 그 신문에 연재한 글을 모아 이 책이 나온 거고.

 

단지 일신이 편하고, 사회적 입지가 무난하다는 이유로 교직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이만한 자긍심과 평화와 생산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있을 자리를 소신껏 결정하여, 있는 힘을 다 해 뿌리를 내렸으며, 이제 그 뿌리에서 새 잎이 돋고 나무로 커 나가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고보니 그의 이름도 예사롭지가 않다. 달 속의 계수나무처럼,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며 위로받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기준으로 삼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자립인간을 발견한 기쁨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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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서령,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거론하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어느 광고에서 쓰인 카피라는데 그 광고를 직접 본 일이 없어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좀처럼 수긍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니, 여러 사람에게 인상깊게 각인된 것으로 보아 카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다지 바람직한 자세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내가 최고라는 얘기인데 그것은 실제로 한 분야에서 정상에 도달한 사람이 갖기에도 오만하고 갑갑한 태도가 아닐까?


내 생각은 위 카피와 정확하게 반대이다. 부러운 것이 아주 많아야 한다. 그것이 날씬한 몸매나 명품백이든, 유려한 문체나 온유한 감화력이든 무언가를 부러워하는 것은 삶의 에너지이다. 그것을 갖기 위해 싫은 회사도 다니다 보면 경력이 쌓이는 것이고, 가슴 속에 도달하고 싶은 별 하나 품고 있으면 고된 훈련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것이지, 아무 것도 갖고 싶어 설레는 것이 없이는 더 이상 삶을 이어갈 이유도 재간도 없는 것이 아닐까?  ‘예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성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딘가 독특한 나만의 삶을 살고 싶었다. 동화책의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하며 키워졌을 그 생각은 이미 나의 성정으로 굳어져, 아무리 성실하고 많은 것을 누리는 삶이라 해도 기존의 것에 순응하는 행태에는 조금도 눈길이 가지 않았다. 기존의 것들을 뒤집거나 새로운 가치를 더 하는 것에만 내 가슴은 뛰었다. 그래서 좌충우돌 남들이 가지않는 길로만 가기도 했지만 여전히 어떻게 사는 것이 ‘독특하게’ 사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내 주변에는 모두가 고만고만한 생활인 밖에 없어 조금 다른 삶을 꿈꾸게 할 만한 계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전의 나는 열심히 살지 못했다.  마치 지금 여기가 아닌 생이 또 한 번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적당히 부적응적인 양상을 보이며 빙빙 겉돌았다.


그렇게 반평생을 보내고 우연히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에 접속하게 되었는데 이 곳은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세속적인 성공을 뛰어넘는 가치를 갈망하는 ‘창조적인 부적응자들’, 즉 나와 비슷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생처음 역할모델을 가지게 되었다. 구본형선생님의 라이프스타일은 내가 막연하게 꿈꾸던 모든 것을 구현하고 있어서,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뜨거운 마음을 품게 해 주었다. 그야말로 뼛속까지 부러운 것이 생겨버린 것이다. 동시에 폭넓은 독서를 하게 되면서 나의 의식은 빠른 시간에 확장되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증세가 경미한 자폐증과 우울증인 줄도 모른 채 외따로 떨어져 쳐져있는 괴짜가 아니다. 내가 이 일을 하러 태어났구나 싶은 천복의 초입에 들어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섬기고 세상을 호흡하며 살고 있다.  연구소가 나의 기준이자 반사대상이 되어 주었기에  흔들림없이 나의 길을 가고 있다.


맘껏 탄복하고 칭송할 수 있는 대상을 갖고 있으면 뜻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을 그대로 모방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 속에 우러난 감탄이 나의 정서를 고양시켜 주기 때문이다. 역할모델을 단단히 마음에 품고 있으면 나의 비전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 분명히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는 확신을 주기에 어지간한 위기에도 좌절하지 않는다. “그 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결단의 장면마다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만으로도 진일보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앞선 사람의 선례를 참고하여 나의 선택과 경로를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니 생각만 해도 부러운 사람을 한 두 명 간직하는 것이 좋다. 지금의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이 도달한 경지는 나의 시야를 넓게 해 주고, 그들이 거기까지 가기 위해 버틴 세월은 내 게으름을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서령이 펼쳐보이는 11명의 명장은 그런 역할을 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들은 모두 남들보다 몸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두 배의 에너지를 갖고 세 배도 넘는 노력을 쏟아부음으로써 보통사람은 바라만 보기에도 숨이 차는, 어마어마한 세상을 만들어 스스로 영주가 되었다. 영역을 막론하고 그들이 이룬 성취에 입이 딱 벌어진다.


최인호는 7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별들의 고향’이 상 하권 합쳐 백만 권이 넘게 팔리고 ‘고래사냥’ ‘바보들의 행진’ 같은 영화를 쓰던 때 그는 명실공히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서울고 2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든가, 재기발랄한 모습은 때로 살짝 가벼워보이기도 했는데 그는 계속 관심을 넓혀 가며 깊어졌다. 그가 집필한 책의 제목만 보아도 가슴이 떨린다. 장보고의 일생을 쓴 ‘해신, 조선 상인 임상옥을 그린 ’상도‘, 가야국의 존재를 새롭게 더듬어낸 ‘제4의 제국’, 유학자들의 삶을 비춘 ‘유림’ 등 어느 것 하나 쉽게 발 들여놓을 수 없는 공부와 사관을 가져야만 나올 수 있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겨우 얇은 책 한 두권 쓰는 입장에서 보니 그가 이 책들을 쓰기 위해 쏟아부었을 시간과 노력이 집힐듯하여 경외심마저 생긴다. 아직도 잘 생긴 청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그 이름 석 자 만으로 영원한 젊음의 상징인 그가 거쳐 온 사상편력에 머리가 조아려진다. ‘샘터’ 에 30년 이상 ‘가족’을 연재한 것만 보아도 그는 외모에서 보이는 경쾌함보다는 지독할 정도로 본업에 집중하는 근성이 더 발달한 인물이었나 보다.


재미있는 것은 최인호처럼 일찌감치 자기 재능에 헌신한 사람도 있지만, 지극히 우연에 기대어 자기 분야를 찾은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리얼리즘 사진의 대가인 최민식은 그림을 그리러 밀항해서 일본으로 갔다가 어느 날 헌책방에서  스타이컨의 ‘인간 가족’이란 사진집을 보고 인생을 바꿔 버린다.  인간사의 반복을 영상 언어로 보여주는 그 책은 “카메라의 성서, 인류라고 하는 드라마, 신비를 수놓은 서사시, 신을 향한 인간의 고백이었고, 관객과 사진가가 손을 맞잡고 올리는 기도”였다.  사진이 이렇게 울림이 큰 것이라면 그림보다 사진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사진인생 50년이 시작되었다.


박경철 역시 별 생각없이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인 줄 알고 의사를 택했다고 한다. 오늘날 그의 명성이 의사라는 직업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분야를 찾기 위해 고심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조금 기운이 빠지지 않는가?  ‘국경을 초월하여 인간의 원시 고향을 눈 앞에 보여주는 현대 문인’이라는 평을 듣는 김양동도 마찬가지다. 그는 시골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하다가 스물일곱에 서예에 입문하였다. 서예가가 되겠다는 목표도 없이 그저 선비의 교양으로 필요한 것이라 여겨, 사실은 다른 흥미를 가질 마땅한 대상이 없어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는 대목에서 어안이 벙벙하다.


의사에게는 모든 사람이 간절히 손을 내밀고, 그 손을 마주 잡을 수 있기에 의사라는 직업이 무지하게 좋다는 박경철, 자신의 역할에 대한 만족은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지는가, 그는 삶의 매 순간을 긍정하는 경지에 도달한듯하다.


“이렇게 촌사람 특유의 무표정이지만 삶에 대해서는 간절할 정도로 존재감을 느낍니다. 사물이 망막에 비쳐 보이는 것도 행복하고, 음식을 먹을 때 식감이 느껴지는 것도 행복하고, 숨쉰다는 것 자체가 몸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좋을 때가 많아요.”


김양동역시 취미로 시작한 서예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서예와 전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문자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문자학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또 절로 상형과 회화의 세계에 다다라, 지극히 독창적인 방법으로 합쳐놓은 글씨와 그림의 세계에서 노닐게 된 것이다. 그의 이런 발언만으로도 나는 기꺼이 그의 팬이 되었다.


“작은 붓에선 기술이 묻어나고 큰 붓에선 정신이 묻어나지요. 예술은 만드는 게 있고 절로 터져나오는 게 있어요. 만드는 것은 한참 보면 싫증이 날 수 있지만 터져나온 것은 볼수록 새롭게 좋지요.”


이들이 지금의 영역이 아닌 다른 분야를 택했어도 지금과 같은 성취를 이루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재능이란 스쳐가는 우연을 알아본 혜안인가, 우연을 갈고닦아 필연으로 만들어놓는 근성인가, 얼추 시간을 써 버린 범부의 가슴에 한 줄기 탄식이 어린다. 이 밖에도 건축가 김석철, 현대음악 작곡가 강석희, 가나아트 회장 이호재, 광주요 대표 조태권, 내촌목수 이정섭 모두 매력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존에 없던 길을 개척함으로써 인간의 경험을 확장시키고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간 창조주들이다. 우리에게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인생을 보여주는 영웅들이다. 영롱하게 빛나는 커다란 별을 바라보며 고개가 아프다고 투정을 부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용문사의 은행나무, 천 년 된 그 나무도 지금도 해마다 조금씩 자란다고, 자라지 않으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최인호의 말만 알아들어도 우리 삶은 백팔십도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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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스토리다, 서영아, 소담출판사 2009


나이가 들수록 ‘아트art'라는 단어가 가까이 다가 온다. 두 가지 의미이다. 하나는 무언가 내 혼이 담긴 것을 만들어낸다는 행위의 소중함- 본연적인 의미에서의 아트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하는 일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예술적 경지로서의 의미이다.


예전부터 연필로 그린 그림 한 장이든, 독특한 감각의 건축물이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닌 창조물에 혹하곤 했었다. 세상에 널린 것들과 어딘가 다른  자기만의 것, 거기에 숨겨놓은 어떤 메시지에 접하면 내 가슴은 뛰었다. 그런 것을 찾아내고 향유하는데  좀 더 몰두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너무나 빈약한 내 감성창고가 민망하다. 그래도 그 가난한 감성의 촉수에 기대어 게으른 문화소비자를 마감하고, 문화의 생산자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표현력이지만 그래도 좋다.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시와 노래, 그림과 그릇, 책과 영화... 무엇이 되었든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나’를 표현함으로써 내 존재를 드러내고,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생존방식이다.


근래에 들어서 ‘예술적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일까 생각이 많아졌다. 결론은 이렇다. 자신의 분야에 통달하고자 꾸준히 노력하는 삶, 비록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성실함으로 극복하여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삶, 자신의 일을 행함에 있어 그 자세와 몰입과 완성도가 예술의 경지에 이른 삶, 그리하여 후학들에게 하나의 길을 보여주고 기회를 나눠줄 수 있는 삶.


이런 생각을 주로 하고 있던 차에  ‘당신은 스토리다’라는 책은 시의적절했다.  대한민국 예술산업에서 하나의 기준이 되고 상징이 된 열 사람의 세계는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미치겠다, 이 사람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의 범주와 성격, 그들이 일에 접근하고 집중하는 방식, 심지어 창조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까지 모조리 환상적이었다.


‘나는 드라마만 생각한다. 그러나 드라마가 아닌 것을 열심히 관찰하고, 익히고, 즐긴다’ 는 드라마 제작자 김기범, 그는 주말이면 일과 관계된 지인을 가족과 함께 만난다. 그 자리에서 일 이야기는 금물이다. 차와 와인 이야기를 하고, 언제나 배경음악처럼 아이들이 뛰어논다. 일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이 아닌가. 머리와 가슴이 그날의 분위기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영감의 순간들을 한껏 받아들인다.


3년 내지 5년 후쯤 완공되는 공간에 소비자의 라이프 스타일을 예측해가며 공간에 필요한 시설을 계획함으로써, 건축회사들의 방향을 잡아주는 스페이스마케팅의 고승현! 이보다 더 직관과 감성이 요구되는 직업이 또 있을까. 그래서 그런가 그녀의 비유는 한 줄의 詩다.


클라이언트가 연두색을 원할 때 나는 초록색과 노랑색내놓는다. 초록색의 향기와 노랑색의 이야기를 섞는다. 그럴 때 나는 과학자 같기도 하고 스토리텔러 같기도 하다. 서로 다른 것을 융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결합과 융합이 새로운 발견을 가져온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동물적인 감성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김중만, 어느날 그는 찬사는 받을 만큼 받았지만 거기 도취되어 생각 없이 흘러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위기였다. 그는 당분간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일체의 상업적 일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서 떠나 스스로 자신을 유폐시켰다. 아프리카 혹은 작업실에서 하루종일 작업만 했다. 오직 사진 속에서 자신을 갈망하게 만드는, 온몸을 전율하게 만드는 순간을 찾아 헤맨다. 그것이 크리에이터로 사는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은 무엇인가”에  “꿈”이라고 대답하는 패션디자이너 강진영, 그는 끊임없이 매혹의 주체자가 되고자 노력한다. 남들처럼 자고 놀고 연애하면서 시간이 기다려주기를 기대할 수가 없다.  술도 담배도 파티도 멀리한 채 화사한 4월에도 어두운 골방에 앉아, 얼마나 더 들끓어야 할지를 고심한다.  이만한 개인의 각오가 사회적 가치, 즉 한 시대의 문화를 만들어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 한 복판에서 ‘와이앤케이’라는 브랜드로 성공했다.


‘나는 어차피 어드벤처가 없는 인생은 재미없다고 생각한다’는 뮤지컬 제작자 박명성, 우리나라 뮤지컬의 50%가 그의 손에서 제작된다. 자신이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끈다는 오너답게 그는 모든 단원과 함께 인도여행만 세 번을 다녀왔다. 그는 크리에이터들에게는 정신과 가치, 철학에 대한 생각이 반드시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의 언어는 하나같이 훌륭했다. 이들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보되, 보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 데 발군의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 밤잠을 줄여 고심하고, 독서를 밥먹듯 하고, 절대고독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며 부단히 노력하여 감성산업의 선봉에 선 사람들, 이들의 메시지는 이 한 줄에 들어 있다.

반짝여라, 번뜩여라, 그러나 무엇보다 진실하라!

핼 스테빈스, -카피캡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음식과 아파트와 뮤지컬을 만든 사람들, 이들은 우리에게도 아티스트가 될 것을 주문한다. 말도 안된다는 소리라고 하지 말라. 현대의 패러다임은 직업군이 아닌 개인이다. 어떤 엔지니어,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남과는 다른 나의 차별점을 아는 자영업자가 성공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결국 스토리가 있는 개인이 힘을 가지게 된다. 이는 특정한 직업에 한정된 말이 아니다. ‘창조성’은 인생을 보다 즐겁게 유연하게 조율해가며 살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마법의 열쇠다.

 


피 속에 창의적인 creative에너지가 흐르고 있는 사람들, 일과 놀이를 일치시키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작업스타일, 라이프스타일, 성공의 스타일이 부러워서, 좀처럼 게을러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재미있게 일하고, 그 일로 사회적 명성을 얻으며, 나아가 경제적 풍요도 일구었으며, 그 사람의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사람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미학적인 의미까지 보탤 수 있는 사람들, 특별한 자본 없이 그러나 21세기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콘텐츠를 가진 사람들, 이들이  바로 입체적인 부자들이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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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언냐~~
    며칠전 블러거님들이 다녀가셨어요..ㅎㅎ
    짧은 1박2일을 보냈는데 그리움이 자꾸 남습니다..^^

    언냐도 빨리 보고 시뽀용..

    2009.05.13 13:54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좋은 시간을 보냈군요.
      블로그를 통해서 만남이 확장되는 세상이 참 신기하고 소중하네요. 어딘가에는 내가 생각하는 배움과 성장과 친밀함을 함께 하는 관계망도 있다는 얘기라서 흥분되네요.^^

      2009.05.15 11:08 [ ADDR : EDIT/ DEL ]
  2. ^^
    토댁님 바로 아래 제가 댓글을 달게 됐네요~ 우리 맘이 통했나봅니다.
    토댁님 댁에 다녀왔거든요. 그리고 저도 미탄님이 보고싶었어요..
    그래서 아. 넘 오래 안뵜네.. 하고 이리로 달려왔고요.

    책은 잘 되가시지요? 번개 놓치지 말아야지~ 늘 생각합니다. ^^

    창조성! 스토리가 있는 개인의 힘... 여러모로 공감되요.
    그런 에너지를 내 안에서 끌어올릴 수 있게 될까..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열심히 담금질 해봐야겠습니다.

    2009.05.13 21:4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ㅎㅎ 상황되면 두 분 새댁님 일정에 맞추어서 시간 잡을게요. 온오프라인의 구분이 없어진 친교가 참 신기하네요. 똑순아빠도 좋아했지요?

      2009.05.15 11:10 [ ADDR : EDIT/ DEL ]
  3. 푸른 퀴리

    미타님, 안녕하세요?
    주근줄아셨나요,혹여....., 사라는 있었답니다.
    성큼, 더운 여름이 와버렸네요.
    이책을 서점에서 들고는 아, 미탄님! 했지요.
    그리곤 블로그방문해보니, 역시나!!!!!!!!!!!!!!!!!!
    일등으로 댓글달고도 싶었지만, 그런것말고 달려가 얼굴보고 얘기하고픈 맘이 커져
    누르느라...............눌렀는데 지나쳐지지가 않네요.
    키위쥬스 한잔 마시고, 또 담에 인사올께요.

    더운날, 향긋한 수박파티 여실것같네요. 오늘저녁 수원화성댁에선...

    2009.05.29 17:14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아! 푸른 퀴리님,
      안그래도 잘 지내시는지 궁금했답니다.
      별 일 없으신지요?
      서점에서 이 책을 보시고 저를 떠올리셨다니
      영광입니다.^^
      아직은 인상적인 '나의 스토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아직은'이라고 스스로 위로해봅니다.

      어느새 여름날씨가 되었네요.
      건강하고 활기찬 여름 되시기 바랍니다.
      가끔 소식 주시구요~~

      2009.05.30 08:35 [ ADDR : EDIT/ DEL ]
  4. 푸른퀴리

    `이우학교, 정현이 서울대가다.`란 책을 읽고 있어요.
    대안학교에 관한 실상에 관심이 가서...
    학업에 스트레스받는 아이에게 시원한 청량제같은 방안이 뭐 없을까,하고^^

    그리고보니,
    지식공동체, 공동육아, 함께 공부하며 신나게 놀기...
    머릿속에서 맴돌며 춤을 추네요.
    일을 하라, 일을! 세상에 하나뿐인 일을!

    (비밀번호를 잊어<위>, 미타님이 되버렸지요. 수정을 못했어요. ㅋ ㅋ ㅋ)

    예!!!! 가끔 들르겠습니다. 상큼한 주말 지내세요,

    2009.05.30 17:58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아이 진학 문제로 신경이 많이 쓰이시지요?
      본인이 좋아하면 대안학교도 괜찮을것 같은데요.

      ㅎㅎ 저도 좋아하는 것을 죽 나열해 주셨네요.
      왜 하자센터는 빼셨어요?^^
      그 곳은 정말 쉬지않고 일을 만들어내는 곳이라
      지금 청년 창업 제안대회 같은 것을 하던데,
      태평성대 같으면 가 보고 싶던데요~~

      2009.05.31 22:30 [ ADDR : EDIT/ DEL ]

댄 헐리, 60초 소설, 류시화 역, 웅진닷컴 2000


댄 헐리는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직업을 가졌다. ‘60초 소설가’! 그는 미국 변호사 협회에서 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길은 아주 새로운 곳에서 열렸다. 1982년 25세에 떠올린 60초 소설가라는 아이디어를 다음 해에 실천한 것이다.


그는 조끼까지 딸린 회색 플란넬 정장에 세로줄 쳐진 흰색 옥스퍼드 셔츠를 입고, 청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진 넥타이를 매고 코끝이 올라간 반짝이는 검은 구두를 신고 거리로 나갔다. 행인들이 자신을 정신나간 사람이나 거지로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시카고 미시간 애비뉴의 인도에 앉아 무릎에 타자기를 놓고 행인에 대한 60초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곧바로 유명해진다. 언론은 그를 ‘거리의 셰익스피어’, ‘길모퉁이의 마르셀 프루스트’, ‘상점 앞의 프로이드’라고 표현했다. 다음은 그가 처음으로 쓴 60초 소설이다.


정말 신기한 일


"어느 구름 낀 오후, 조지와 미치는 미시간 애비뉴를 거닐다가 갑자기 살아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미치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고 심장이 뛰고 있으며 지금 미시간 애비뉴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세상이 돌아가는 동안 그 영원한 세월 내내 자신이 죽어 있었음을 갑자기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낀 것이다.

조지는 이것이 자신의 인생,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떨렸다. 그는 피부에서 땀이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귀로 자신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실제로 사물들을 볼 수 있었다. 소리들을 실제로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신비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은 과거 속에서 산다. 내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다.  매순간 어딘가로 달아나려고 애쓴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정말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그러므로 갑자기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신비하고 낯설고 이상한 일이다. "



그는 16년 동안 22,613편의 60초 소설을 썼으며, 그의 사이트는 www.instantnovelist.com 한 달에 5백만 명이 찾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대학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그는 짧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에게 가장 중요한 현실을 꿰뚫고, 그것을 풍자나 우화적 기법으로 비틀어 60초 소설로 옮겨 놓는다. 이 책은 그동안 쓴 60초 소설 중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60여 편의 글을 모아 펴낸 것이다. 그 중에서 베스트3를 뽑아 보았다. 냉소적인 프로그래머에게 써 준 글에서는 우회적으로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기지가 돋보인다.



유니버스 2.0

"닉은 텍사스 주 오스틴에 사는 불만으로 가득한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그는 시스템에 반대했다. 도시에 사는 모든 젊은 전문가들을 모조리 싫어했다. 순종적인 사람들은 누구나 싫어했다. 회색 양복과 회색빛 마음도 싫었다.

그래서 그는 우주의 근본 설계에 관련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세상을 운영하는 프로그램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새로운 프로그램에 그는 ‘유니버스 2.0’이라는 이름을 붙일 계획이었다.

그 프로그램이 작동하면 모든 사람이 소시민적이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대신, 정열적이고 대담하게 행동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회색빛 순응주의자가 되는 대신,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생각없이 쇼핑이나 다니고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중산층이 되는 대신, 세상의 모든 사람이 평화와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해 살아가리라.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의 프로그램에 몇 가지 오류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닉의 성격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 주었다. 유니버스 2.0이 세상에 나오려면 아마도 몇 주일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NBC 뉴스 앵커맨인 톰 브로커가 호기심이 많아서 저널리스트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다음 글을 쓴다.  단 한 마디에서 톰 브로커의 유형을 간파하는 통찰력, 그것을 유머와 섞어 60초 소설로 옮겨놓는 순발력이 기가 막히다.


톰 브로커의 끝없는 호기심

"톰 브로커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하늘이 왜 푸른색인지 알아야 했다. 훗날 방송기자가 된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습니까?”

“얼굴 화장이 잘 되었나요?”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와 라이벌인 댄 래더가 나보다 잘하고 있습니까?”

지식에 대한 욕구도 끝이 없어서, 무엇 때문에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지, 왜 바보들이 사랑에 빠지는지 알아야만 했다. 또 상승이란 얼마나 높이 올라가는 것인지, 왜 삶에서 유일하게 변치 않는 사실은 삶이 늘 변한다는 것인지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답은 끝내 알 수 없으며, 수수께끼도 풀리지 않게 되기를 톰은 기도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위대한 미지의 사실을 알려고 시지프스처럼 계속 분투하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저녁 뉴스의 시청률이 형편없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



만화가 줄 파이퍼가 난데없이 지붕이 엄청나게 새서 고민이며 부엌에서 잤다는 말을 듣고는 이런 글을 써 주었다. 비가 샌다는 짜증나는 상황에 순식간에 환타지를 입히는 이 상상력을 보라! 



완전한 변화


"만화가인 줄의 침실에 비가 새기 시작했다. 지붕이 주저앉고 있었다.

줄과 그의 아내 제니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부엌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딸 할리도 비바람 속에서 잠에서 깨어나 가정부 방으로 갔다. 그들은 떨어지는 빗물을 받기 위해 집 안 곳곳에 쓰레기통을 받쳐놓아야 했다. 하지만 비는 계속해서 내렷다. 무려 서른 밤 서른 낮을 쉬지 않고 내렷다.

마침내 비가 그쳤을 때, 카펫에서는 이미 풀이 자라기 시작했다. 줄이 만화를 그리기 위해 나갔다 돌아오자 침대에서 단풍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기자인 그의 아내가 어느 정치인의 재판을 취재하고 돌아와 보니, 그들의 옷장에서 작은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토끼가 덤불 속에서 뛰어다니고, 나비가 날고, 개들이 짖고, 소들이 돌아다니며, 들소가 돌아오고, 마침내는 공룡도 나타났다.

그들의 침실은 자연에 의해 새롭게 바뀌고 있었다. 마침내 줄은 집을 지은 건축가에 대한 분노와 불쾌한 감정을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옷을 벗어 던지고 아내 제니와 함께 아담과 이브가 되어 그들의 에덴 침실에서 즐겁게 춤을 추엇다.

바로 그때 건축가가 나타나 비 새는 지붕을 고쳐 주었다.

이제 막 재미있어지려는 순간에. "



살아가느라고 바쁘고 힘들어서 정작 왜 살아가는지를 잊어버리기 일쑤인 우리들에게 댄 헐리는 슬그머니 60초 소설을 내민다. 그 속에는 유머와 동화적 상상력과 자기통찰과 사물을 다르게 보는 인식의 전환이 들어 있다.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의 60초 소설을 읽는다. 그리고 허를 찔리거나 커다랗게 웃는다. 그럼으로써 아주 소중한 것을 하나 깨닫는다. 진짜 소중한 보물은 지금 이 순간이라는 사실이다. 댄 헐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현실 세계에서 해피 엔딩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짐으로써 해피 엔딩을 이룰 수 있을 뿐이다.”


댄 헐리의 인생을 접하고 나니 나도 일을 벌리고 싶어진다. 그가 60초 소설을 떠올린 것처럼 촌철살인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를 기도하고 싶다. 단순한 일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을 만나고 배울 수 있어 나날이 깊어지는 일, 나 자신과 남들에게 해 준 가장 훌륭한 일, 그리하여 내 생애 최고의 파티가 될 수 있는 일!  그런 일이 하고 싶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일이라면 더 좋고!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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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60초 소설을 쓰려고 블로그에 카테고리를 만들었는데 아직 한 편도 쓰지 못했네요. 문득 그 기억이 떠올라 조금 괴롭습니다^^

    2008.10.23 15:24 [ ADDR : EDIT/ DEL : REPLY ]
    • 아~~ 그랬군요. 저도 60초 소설에 상당히 땡겼는데, 비슷한 취향이 있나 보네요? ^^

      2008.10.23 23:35 신고 [ ADDR : EDIT/ DEL ]

 

이동진, 꿈을 볶는 커피집 비미남경 이야기, YoungJin.com, 2004

요즘 심산스쿨에서 강헌 재즈반을 수강하고 있다. 재즈반에 가면 누군가 항상 와인을 가져온다. 강헌선생이 와인을 마시며 수업을 하자는 제의를 했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수원에서 신촌까지 가려면 꾀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수업에 가면 금방 신이 난다. 메모 하나 없이 썰을 푸는 강헌선생의 구라도 일품이고, 와인을 마시며 듣는 재즈도 최고이기 때문이다. 어느날 와인반을 수강한 급우 하나가 가져온 Hess를 마시는데, 향기가 오래도록 입에 남았다. 조금씩 사지가 풀리면서 적당히 기분이 좋아지고, 몸을 흔들며 재즈에 반응하다 보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  게다가 와인은 마시고 난 다음날 두통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로, 점점 와인이 좋아진다.


이렇게 재즈와 와인에 조금씩 맛을 들여가고 있는데, 커피까지 눈여겨 보게 생겼다. “꿈을 볶는 커피집 비미남경 이야기”라는 한 권의 책 덕분이다. 점점 한량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풍류를 즐겨라” 내 식대로 나이드는 방법에 하나가 추가되고 있는 것이다.


‘비미남경’은 이대 앞에 있던 10평짜리 커피집의 이름이다. 검색을 해보니 없어진지 한 두 달 된 것 같다. 득달같이 찾아가 보려고 했는데 서운하기 그지없으나, 이 책이 내게 준 영감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 ‘비미남경’이라는 이름은, 설립자인 재일교포가 자신의 네 자녀의 이름 자를 하나씩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설립자에게서 의뢰를 받은 저자가 3년 반 정도 ‘비미남경’을 운영한 이야기이다. 쉽고 간단하여 단숨에 읽히지만, 작아도 문화적 파급력이 큰 사업을 하는 방법에 관해 많은 암시를 준다.


‘비미남경’에는 열정이 있다. 저자가 커피에 눈뜨게 된 계기는 단순했지만, 저자는 지속적인  열정을 통해 그 만남을 운명적으로 만들었다.


‘비미남경’은 4층짜리 스타벅스 1호점과 마주하고 있다. 저자는 이 곳에서 별다방과의 한판 승부를 꿈꾼다. 엄청난 마케팅과 대자본의 힘으로서가 아닌 커피 그 자체만으로 언제든지 한판 붙어볼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비미남경’의 컨셉을 설명하기 위해 거론한 예화가 흥미롭다.


일본의 햄버거 업계 1, 2 위를 다투는 맥도날드와 모스버거는, 모든 면에서 상반된 컨셉을 가지고 완전히 다른 것을 지향하면서도 나란히 업계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성공하는 길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화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맥도날드

           모스버거

   상     권

유동인구가 많고 시내 중심인

최고의 상권에 개설

주택가나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조용한 입지 선정

   서 비 스

패스트푸드 개념으로 고객이 기다리지 않도록 이미 만들어 쌓아놓는다

슬로우푸드 개념으로 햄버거를 주문하면 그 때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가     격

매우 저렴, 일본의 비싼 물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맥도날드 가격과 거의 비슷

맥도날드에 비해 네 배 이상 비싼 가격, 웬만한 한끼 식사값

       맛

어느 점포에서든 정형화된 동일한 맛

자율 점포 개념이 도입되어 각 점포마다 다른 특색을 지닌 맛



‘비미남경’의 컨셉은 물론 모스버거 쪽과 많이 닮았다. 제대로 된 맛을 전달하기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는 점을 비롯해서 약점을 최대의 장점으로 승화시켜 강점으로 승부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비미남경’에는 이야기가 있다.

“커피의 쓴맛을 느끼려 하지 말고 쓴맛 뒤에 밀려오는 단맛을 느끼려고 해보게”

“그리고 기왕이면 눈을 감고 느껴 보게나. 커피는 마시는게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는 걸세”

호시노 라는 커피장인이 한 말에서 저자는 ‘비미남경’의 광고문구를 만들어낸다.

“느낌을 녹여 만든 커피, 비미남경”


‘비미남경’의 커피 메뉴판은 스토리텔링 마케팅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달랑 커피 이름만 써 놓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감성적인 부연설명으로 커피와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 만델린’ 은 ‘옛 추억이 떠오르는 커피’이며, ‘아스름히 옛 추억에 잠기게 하는 풀내음과 흙내음이 살짝 감돌고 풍부한 깊은 맛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런 식이다.

순수한 처녀림의 비밀을 담은... 파푸아뉴기니 내츄럴

아프리카 마사이족의 영혼이 담긴... 케냐AA

숨어있는 꽃향기 찾기... 이디오피아 모카

화가 고호가 사랑했던... 에멘 마타리


뿐만 아니라 이 곳에서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비미남경만의 작은 작업을 할 수 있다. 벽걸이 그라인더에서 커피를 갈 수 있게 해 놓은 것이다.

“비미남경 화장실에서의 팁 하나, 앞에 준비된 원두알갱이를 그라인더에 넣어 갈아보세요. 커피향기가 솔솔, 지루함과 화장실 냄새도 싹~. 갈아진 커피가루는 앞의 화분에 담아주세요.”

그래서 비미남경의 화장실은 언제나 커피냄새로 진동을 한다.



‘비미남경’에는 자부심이 있다.  이 곳에서는 원두에 대한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마다 로스팅을 하고 납품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 매장에서 사용양의 15일치만 제한하여 납품한다.

이는 생산자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비효율적인데다 물류비용등 납품상의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렇게 한다.

하나는 ‘비미남경’의 원두를 공급받아 사용하는 업체나 매장들이 혹시라도 커피의 신선도에 대한 중요성을 망각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둘, 그들이 신선한 커피를 사용하여 고객을 대접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들 스스로가 고객들에게 맛과 향이 그대로 살아있는 신선한 커피를 대접한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질 때, 비로소 고객들도 그들이 마시는 커피를 신뢰하게 되며 나아가 그 집 커피의 확실한 팬이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알기 때문이다.


이런 자부심에서 최고의 퀄리티가 나온다. 전문성이 나온다.


‘비미남경’에는 도전정신이 있다. 그래서 커피문화를 선도하는 다양한 활동을 한다. 커피관련 잡지인 ‘커피 앤티’에  ‘이 달의 커피’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월간 커피’에는 한국 최초의 커피 만화를 연재한다. 커피에 대한 교육도 실시한다. 외국계 초대형 기업을 공략하여, 

‘선마이크로 시스템즈’를 위시한 테헤란로의 외국계 기업들에게 납품한다.  그 회사내에는 전문 바리스타가 있는 커피 바가 있다는 사실이 또 참신하다.


백화점 내에서 직접 커피를 볶아 판매한다는 기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왕이면 가장 입점하기 어렵다는 곳에 도전하기로 결정하여, 분당 삼성플라자의 담당자를 찾아가 ‘비미남경’ 커피의 차별성을 어필하였다.

“희소성있는 스트레이트 커피와 블렌드 커피의 다양성, 거품을 뺀 저렴한 가격 경쟁력, 갓 볶은 커피로서의 타 커피와의 차별성, 고객의 발을 붙드는 커피의 고소한 향기 마케팅, 로스팅의 실현과 퍼포먼스의 독특한 이벤트, 시음을 통한 고객의 접근용이성”은 “먹혔다.”

이로써 저자는 말한다. 대형 마트나 아울렛 등 기회의 장소는 널려 있으며, 경쟁력을 갖추기만 한다면 아무리 작은 규모의 가게라도 얼마든지 최고의 브랜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선례를 커피업계에 남기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고.


책은 참 좋은 상품이다. 얇은 책 한 권으로 해서, 나는 커피에 눈을 뜨게 되었다.  ‘바리스타’ 가 되어볼 생각도 있으며,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시러 다니는 일로 레퍼런스를 쌓고싶어진다. 재즈와 와인과 커피라~~  무언가 한 가지 방향으로 나를 밀고 가는 힘이 느껴져 신기할 정도이다. 이런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일이 내 몫이리라. ‘비미남경’처럼 작으면서도 다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문화적 파급력이 큰 일을 하고 싶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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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비꽃

    정보가 있는 좋을 글 잘 읽었어요. 한선생님.
    원두커피는 물처럼 마시게 되어서, 그 양이 쌓이니 잠이 잘 오지 않더군요.
    와인...저도 최근에 와인바에서 아주 기분좋게 마신 다음날, 속이 편하고 머리가 아프지 않아서 와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래서 제 모임의 신년파티를 와인바에서 하기로 했다는.
    좀 비싸지만 신년 첫 모임이라 지르기로 했어요.

    글쓰기를 통해 문화적 파급력을 퍼뜨리는 일,
    우린 편히 읽으면서 정보 얻네요. 감사합니다.

    2007.12.30 22:20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와인바에서의 신년파티라~~ 멋진 '아티스트 데이트'로 신년을 시작하네요. 보기 좋아요.

      요즘 내가 책을 읽는 경향이 실용서, 경영서 쪽으로 번져서 좋아요. 쓰잘데 없이 진지한 내 기질이 현실성을 얻어가는 것 같아서요. '비미남경'같은 커피집에서 학습프로그램 만들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

      2007.12.31 18:35 [ ADDR : EDIT/ DEL ]
  2. 소정

    ㅋㅋ 비미남경 없어졌어요? 전 없어지기 전에 다녀왔었는데. 한참 커피에 관심있을때. 스타벅스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어서 더 흥미로웠었죠...
    오랫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정성들여 커피를 내리시던 매니저 모습이 생각나요 ^^

    2008.03.10 18:48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하이, 소정! ^^
      마침 가까운 문화센터에 바리스타 과정이 있는거야.
      글쓰기에 대한 관심을 제외하고는, 너무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아 고려중인데,
      글 쓸 때는 예민한데, 당최 그 밖의 일에는 왜 이렇게 둔감한지, 내가 할 수 있을까? ㅜㅜ
      요즘 환해진 모습 참 보기좋아. 언제고 변화와 도약이 필요해질 때 연구원 경험이 커다란 힘이 되어줄거야.

      2008.03.11 08:35 [ ADDR : EDIT/ DEL ]

  정문술, 아름다운 경영, 지와채, 2004

원칙적이고 인간적인 경영, 2000년 국내 최초로 미국 나스닥에 상장, 카이스트에 300억 기부 등 확실한 족적을 남긴 경영인 정문술의 인상은 지나치게 평범했다. 책 표지에 실린 사진은 보통 기술자의 모습이었다. 물론 깐깐해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가진 사람은 너무 많다. 가장 보편적인 대한민국 가장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 평범해보이는 인상 어디에 정문술은 그 많은 것을 꾸려넣고 있었을까. 게다가 그는 그 많은 것을 다 어디에서 배웠을까. 자기 말마따나 어려서 공부에 뜻이 없어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보결로 들어갔고, 기술이나 경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원광대 종교철학과를 나온 사람이!


그는 육군에 근무하던 중 행정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정보부로 특채되어 18년간 근무한다. 당시 그의 보직승진이 초고속이라 주변에서는 든든한 빽이라도 있는줄 알았다고 한다. 정문술은 자신의 빽이 ‘호기심’이었다고 말한다. 군에서 접한 기획관리와 문서관리, 행정시스템의 합리성과 효율성에 매료되어 무슨 일이든 찾아서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부터 그의 특질이 드러난다. 기획관리와 문서관리에 매료될 일이 뭐가 있는가, 얼핏 봐도 매혹적인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정문술은 학과공부와 상관없는 타고난 현장성 학습인이다. 자신의 호기심에 걸려든 일에 깊이 몰입하여 따져묻고 공부하여 기어이 자기영역을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다. 중앙정보부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서양화 한 점에 매료되어 시작했다는 그림공부 역시 그렇다.


그는 독학으로 자신의 감각을 키우고 그림을 사들여야 할 시점을 알아차렸다. 한 점 두 점 사모았던 그림은 회사가 어려울 때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의 학습기질은 계속해서 발휘된다.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중앙정보부에서 강제해직된 정문술. 43세, 군대생활만 해보았을뿐 사회생활 경험이 없는 그는, 쭉정이 금형공장을 인수받아 퇴직금의 절반인 2천만원을 날려버린다.


그리고 1983년, 그는 반도체 분야에 뛰어든다. 가까운 미래에 반도체가 크게 각광받을만한 사업이라는 상식 정도가 사전지식의 전부였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젊은 시절 그를 사로잡았던 호기심과 열정 패기 낭만 모험심 승부근성을 공무원 서랍에서 다시 꺼내 들고, 그는 다시 겁이 없어지기로 작정한다. 다짜고짜 반도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악전고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음으로 개발한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는 실패였다. 개발을 하긴 했는데, 기계의 속도가 숙련공의 4배가 걸렸다고 한다. 18억을 삼킨 바보장비를 만든 것이다.


“죽읍시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이 없구려.”

비감한 말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준 아내. 평생에 걸친 아내의 침묵과 순종이야말로 자신의 모험심과 배짱의 진짜 배후였고 뒷심이었다며, 정문술은 책의 끝부분을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여자인 나로서는 평생을 침묵하고 순종해야 하는 배역이 영 이해되지않고 마음에도 들지 않지만, 성공하는 경영인의 입장에서는 필수적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동반자살의 지경까지 갔던 정문술은, ‘나는 용궁에 갔다 온 사람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촌스럽고 진부하지만 자신이 경험한 절망의 나락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비유이기 때문이다. 없음의 극한을 경험해 보았다는 것이다. 돈 때문에 죽을 고비까지 넘겨야 했던 그는 언젠가 반드시 돈을 극복해보겠다는 보복심리를 갖고 살아왔다. 신의와 의리로 여봐란 듯이 성공해서 그렇게 번 돈을 또한 아낌없이 포기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겠다, 그래서 인간이 그까짓 돈보다 얼마나 우월하고 귀한 존재인지를 끝내 증명해 보이리라, 이를 악물고 맹세해가며 버텨왔다는 것이다.


절망의 나락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학습인 정문술, 그는 정말 자신이 생각한대로 되었다. 그깟 돈이 없어서 꿈을 접어야 하는 사람들이 가여워, 인정할만한 사업계획을 갖고 오는 사람에게 아낌없는 투자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카이스트에 300억을 기부하여, 아름다운 경영과 진정한 부자의 표상을 보여주었다.

카이스트에 300억을 기부할 때도 진정 정문술은 정문술다웠다. 기부를 하더라도 열정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한창 때 하고 싶어, 자선에 대한 공부를 한 결과이다. 생명과학과 정보기술과 기계기술을 서로 융합하여 학제간 연구를 할 수 있는 첨단학과를 신설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이오시스템학과’, 나같은 문외한은 발음조차 어색하나 ‘과학콘서트’의 저자 정재승이 ‘바이오시스템학과’ 조교수인 것을 보니, 조금 친밀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러고보니 정문술은 명예욕이 대단한 사람이다. IT업계에 대한 파격적인 지원으로 ‘벤처대부’라는 칭호를 얻었거니와, 富를 제대로 쓰는 방법을 터득한 것도 그렇다. 매스컴의 떠들썩한 칭찬에 대해 그는 말한다. 추하지 않게 늙어가며 남은 인생을 편안하게 살아보겠다는 또 다른 노욕老慾의 발로일 뿐이라고. 그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 욕심이 많고 욕심의 폐부를 꿰뚫어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욕심에 파묻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필생의 역작이자 꿈의 공간이라고까지 여겼던 ‘미래연구센터’의 준공식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은퇴했으면 온전하게 물러나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카이스트의 정문술 빌딩 준공식에도 불참한다. 기부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고향사람들의 청탁을 피해 고향갈 일을 줄이느라고 부모님 산소까지 이장했다는 대목에서는 무섭다는 생각까지 든다. 자기다움을 관철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버티는 모습 앞에서, 아무 것도 지킬 것없이 허비하며 살아온 내 모습이 부끄러울 뿐이다.


나이든 자의 욕심이라 해서 정문술의 그것을 어찌 노욕老慾이라고 부르랴. 우리 사회가 나이든 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는 모든 탐욕과 어거지 그래서 노추老醜가 되는 것들로부터 그는 진정 멀리 있다. 젊은 누구보다 직관적이고 젊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짱짱한 정문술, 한 분야에서 도통하면 다른 분야에까지 전이가 되는 것인가. 그의 문장은 평생을 글쓰는 일로 살아온 수필가의 문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거기에 뜬구름잡는 선문답이 아니라, 진흙탕 싸움에서 멋지게 승리한 경험담을 풀어놓으니, 알짜배기 인생교훈이 되었다.


보라, 정문술의 어록을, 책상 앞이 아니라 전선에서 몸을 굴려 살아남은 자만이 줄 수 있는 빛나는 교훈이다. 들어라. 젊은이여. 젊은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은 널널하지 않다. 언젠가는 소멸되는 것이다. 미래를 향해 자신의 꿈을 위해 아낌없이 투신하지 않고는 언젠가 빈 손을 쳐다보는 막막함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래는 맞이하거나 준비하는 게 아니다. 확신을 갖고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 나이가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열정과 위험을 사랑한다. 그 아름다운 무모함을 죽는 날까지 곁에 두고 싶다.


부자를 탈피함에도 나름의 취향이 있고 기질이 있을 법하다. 나는 벤처인이다.


만사 8할만 추구할 일이다. 100%에 도달하기가 쉽지도 않거니와 100%를 추구하는 많은 이들은 기껏 쌓아 온 것들마저 탕진하거나 하다 못해 세인의 빈축을 산다. 섭생攝生이 그렇고 치부致富가 그렇고 권력이 또한 그렇지 않은가.


오동나무는 세 번 잘라 줘야 하는 법이네. 기를 죽여야 크게 자라지.”


오동나무 부분에서 조금 울었다. 지금 제대로 잘려있기 때문이다. ^^ 누군가 나를 크게 키우기 위해 내 기를 죽이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문술의 체험과 통찰이 집약된 부분을 옮기며 긴 글을 맺기로 한다. 내가 지금 이 책을 만난 것도 하나의 전조이다. 늦게나마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한 척후병이다. 나도 언젠가는 ‘정문술’ 처럼 말할 수 있겠지. ‘운이란 지독한 집중력으로 일궈내는 필연’이라고.


“아무리 사소한 트랜드라 할지라도 반드시 전조가 있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조그만 암시라도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제때 포착하기 위해서는 늘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할뿐더러 무엇보다 길목을 제대로 지키고 서 있어야만 한다. 정확한 길목을 지키고 서서 눈을 부릅뜨고 있다보면 분명 척후병이 포착된다. 척후병이란 곧 ‘조짐’이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는 길목은 특정한 매체나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가 주로 흘러다닐 만한 ‘요충지’를 뜻한다.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척후병을 잡게 되면 그때가 바로 결정의 순간이다


직관이란 개념도 내게는 우연이란 개념과 동류다. 일정한 트랜드를 관찰하다 머릿속에 불쑥 떠오르는 어떤 예감, 또는 복잡한 상황을 순식간에 단순화시켜 실무와 의사결정에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직관력있는 사람이다. 그는 길목을 제대로 지키고 서서 늘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직관에 대한 믿음도 생기는 것이고 그 믿음을 밑천으로 과감한 행동에 돌입할 수도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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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성 특유의 응석이라는 표현을 접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응석은 일본남성의 전매특허라고 여겨져 왔던 것입니다. 여성에게서 어머니를 찾고 언제까지나 또 하나의 제멋대로 노는 어린아이로서, 아내에게 무한의 허용을 구하는 것이 일본 남성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성에게는 그러한 남성을 떠받들면서 잘한다고 띄워주는 자존심 지켜주기 역할이 배당됩니다. 그런 것을 할 수 없다고 하며, 남성이 부여한 여성용 지정석에서 내려오라고 말한 것이 페미니즘이었습니다."

- 조한혜정, 우에노 치즈코 지음, ‘경계에서 말한다’에서 -


요즘 ‘드센 여자들’이 왜 이렇게 많으냐고 투덜대는 당신에게 조금 해명이 되었나요? 페미니즘이란, 모성의 희생을 모두 여성에게 짐지우고, 남자는 어느 것도 손을 대려하지 않는 ‘응석’을 거부할 뿐이라고 하네요.


자녀양육이나 가사노동, 노인 봉양이 모조리 여자 몫이었습니다. 교육과 기회, 문화의 세례를 받은 현대여성이 어머니 세대의 삶을 물려받기에는 무리가 있을수밖에요.


생각해 보십시오.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는 어머니를 둔 딸들은, 수퍼우먼을 강요하는 그렇게 힘든 인생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겁니다. 전업주부의 딸들은 으스대는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며 그림자로 사는 일을 평생의 목표로 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는데 왜 그렇게 요구사항이 많으냐, 혹은 전통적인 여자로 사는 것도 의미있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저는 조용히 묻고 싶습니다. 평생동안 당신의 배우자와 역할을 바꾸어서 살아갈 수 있으신지요?


이 책의 저자 두 사람은 소문난 페미니스트입니다. 제각기 연세대와 도쿄대의 사회학과에 재직하며, 학문과 실천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이 책은 여성운동은 물론, 국가와 근대같은 어려운 주제에 대한 접근을 도와줍니다.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시야와 명쾌한 글솜씨가 기가 막힙니다. 짧은 편지글 형식에, 정치와 가족과 여성을 중층적으로 꾸려넣은 조감도에 감탄합니다. 학문이라는 것, 공부한다는 것의 매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그것은 내가 속해있는 사회와 시대를 무한대로 확장시켜 읽을 수 있는 안경입니다.


또한 이들은 관심사의 변천에 따라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어가며, 실천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의 문화’에 이어 ‘하자센터’로 대안문화의 수장 역할을 해온 조한혜정은 요즘 들어 공동체건설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글쟁이가 산파에 교장을 하더니, 족장까지 할 모양입니다. ^^


우에노 치즈코도 만만치 않습니다. 젊어서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였으나, 시민주권과 장애인운동을 거쳐 고령사회에 대한 대비책에 푹 빠져있으니까요. 일찍이 ‘우에노세미나’를 통해 자신의 학생들에게 ‘오리지널’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그녀가 말합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 만큼 완고해진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반 세기 이상 살아보면 이 세상에는 별별 일이 다 있다는 것이 뼛속까지 사무치기 때문에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령이라는 미지의 경험에 접어들어 스스로 열어가는 변혁의 실천에 가슴이 뛴다구요.


연장을 바꿔가며 능란하게 싸움을 주도하는 조직패처럼 그들에게는 국경이 없습니다. 경계를 가로지르는 그들의 현란한 발걸음이 마치 춤사위처럼 매혹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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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을 뛰어넘은 사우(師友) - 고미숙과 연암 박지원
고미숙지음 - 열하일기,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저자소개 - 고미숙


1960년 강원도 정선군 조동리 출신 - 내가 접한 저자 중 가장 산골 출신.
고대 국문과 졸업반 무렵 김흥규 선생님의 ‘고전소설 강독’을 듣고 고전문학으로 방향잡음.
87년 박사과정 시절 맑스주의의 세례를 받음.
이진경, 고병권과 연결하여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키워나가면서 ‘근대성’에 대한 집중탐구시작.
2001년 우연히 <열하일기>를 접하게 되면서 연암 박지원과 ‘운명적인 해후!’를 하다.
그녀의 꿈 - 축제, 지식, 명상을 모토로 삼는 인디언 코뮌을 만드는 것
가장 좋아하는 TV프로그램 - 동물의 왕국 <인간의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다고>
저서-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나비와 전사



- 소감

고미숙이 교과서 속에 갇혀있던 연암 박지원<1737 ,영조 13 ∼ 1805 ,순조 5>을 불러냈다. 북학파의 거두요, <호질>과 <양반전>의 저자로 그저 암기대상이었던 연암이, 귀엽고 유머러스하고 못말리는 호기심의 제왕이며 우정(友情)에 목숨을 걸었던 싸나이로 환생하였다.

고미숙에 의한, 고미숙의 연암을 읽으며 역시 고미숙의 열정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연암 역시 고미숙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니, 그는 천재적 문장가로 정조의 러브콜을 수없이 받았으나, 주류적 가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 ‘창조적 소수자’요, 선진문물에 대한 탐구열과 이용후생정신에 빛나는 세계인이요, 우정이 지상목표였을 정도로 사람에 대해 열려있었으며, 유한한 인간조건을 웃음으로 희롱한 호모 루덴스였던 것이다. 고미숙이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에 정확하게 연암 박지원이 겹치는 것이고, 그 때문에 고미숙은 희희낙락 연암을 소개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이다. 200년을 뛰어넘은 완벽한 교감 - 식자(識者)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열하일기>는 1780년(정조 4), 연암이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熱河)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조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일대를 견문하고 그 곳 문인·명사들과의 교류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일기이다.

26권, 10책으로 되어 있으며 고대한문소설로 유명한 <호질(虎叱)>도 열하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 연암은 중원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홍대용이 한 발 먼저 중원에 다녀와서 쓴 <회우기(會友記)>를 보고서 가슴벅찬 감격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은 남북으로 멀기도 하고 좌우로 광할하기 때문에 도로의 이수를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호호탕탕 광대무변의 땅입니다. 그러나 소와 말도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들은 은연중 이 조선만을 실재하는 세상으로 생각하여 수천리 우리 안에서 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생애를 영위하고 있습니다. ’ 78쪽

그러다가 본인이 직접 중원에 발을 딛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 오죽하랴!
연암은 언제 어디서나 선비와 장사치를 가리지 않고 교류하며 필담을 통해 선진문화의 조류를 파악하려 애썼으며, 산천과 성곽, 배와 수레, 각종 생활도구, 저자와 점포, 서민들이 사는 동네, 농사, 도자기 굽는 가마, 언어, 의복에서 역사, 지리, 철학 등 고담준론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는 박람강기(博覽强記)를 남겼다. 88쪽

그런데 그 기록이 고문으로 딱딱하지 않고, 재기발랄한 호기심과 열정에 가득찼는가 하면, 섬세한 감수성과 묘사력이 절절하다. 그것을 고미숙은 연암의 원초적 명랑성이 지닌 저력이라고 한다. 슬픔의 밑바닥을 본 자만이 유쾌하게 비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빛나는 명랑성과 깊은 애상은 상통한다고 한다.
니체의 아포리즘을 빌리면 ‘산정과 심연은 하나이다’
‘심해(深海)를 항해하고 돌아온 자만이 발산할 수 있는 강철 같은 명랑함’이라는 것이다.
98쪽

애초에 고미숙이 연암에게 매료된 것은 그의 유머 때문이라더니, 과연 곳곳에서 연암의 천진난만한 명랑성이 돋보였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봄날,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양손을 갑과 을로 나누어 ‘쌍륙놀이’를 하는 모습. 달빛아래 자기 그림자와 노는 모습. 연암은 ‘기운은 족히 육합을 가로지를만 하고, 재주는 천고를 능가할 만하며, 글은 온갖 부류를 거꾸러뜨릴 만한’ 천재였다. 몸집이 우람했으며 귀신을 질리게 할 정도의 양기를 지녔다고 한다. 그런 연암의 ‘혼자 놀기’는 동심, 어린이-되기가 성숙한 인격의 요건임을 보여준다.

서울을 떠나는 순간부터 중원의 선비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중원에 가 큰 선비를 만나면 무엇으로 기선을 제압할까? 옳다구나, 지전설과 월세계 이야기로 그를 애먹여 보자’ 고 말 위에 앉아 하루에 몇 권의 책 분량을 꾸며보는 모습도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한다.

고미숙은 연암을 타고난 장난꾸러기 -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터주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기꺼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건들마다 ‘유쾌한 악센트’를 부여하는 악동! 이라고 표현한다.
심지어 <열하일기>는 연암이 펼치는 ‘개그의 향연’이라고 !
고미숙의 애정어린 탐구심에 의해 연암은 이 시대의 ‘호모 루덴스’로 거듭난다.

소문난 문장가 연암의 문체론도 돋보인다.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하여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133쪽
연암도 자신의 문체에 자부심을 보인다.
“황대경씨의 글이 사모관대를 하고 패옥을 한 채 길가에 엎어진 시체와 같다면, 내 글은 비록 누더기를 걸쳤다 할지라도 앉아서 아침 해를 쬐고 있는 저 살아 있는 사람과 같다”
200쪽

연암의 이런 문체론은, 고문을 신성시하는 사대부이데올로기에 치명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정조의 ‘문체반정’을 가져온다. 연암에 대한 정조의 애증(愛憎) 스토리도 인상적이다.

문체에 대해서는 고미숙도 할 말이 많다. 학위논문이 아니라 레포트 수준에서도 좀 개성있는 문장을 시도해 볼라치면 ‘그건 비평체 아냐’하며 가차없이 질책을 받았다는 것이다. 문체야말로 체제가 지식인을 길들이는 첨단의 기제라는 것. 그러나 고미숙의 솔직발랄한 문체가 오늘의 고미숙을 있게 하였다. 그녀도 연암의 문체론에 덧붙인다.
“말하자면 글이란 읽는 이들을 촉발하는 공명통이어야 한다. 찬탄이든 증오든 공명을 야기하지 못하는 글은 죽은 것이다.”

연암은 또한 신분에 상관없이 두루 사람을 사귀는 능력이 탁월했다.
홍대용과 정철조, 서얼인 박제가와 이덕무, 유득공, 서자 출신인 백동수 등이 주 멤버였다.

“벗이란 ‘제2의 나’다. 벗이 없다면 대체 누구와 더불어 보는 것을 함께 하며,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 하며, 입이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맛보는 것을 같이 하며, 누구와 더불어 냄새맡는 것을 함께 하며, 장차 누구와 더불어 지혜와 깨달음을 나눌 수 있겠는가?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 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 그것은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절대적 비극인 까닭이다.” 65쪽

연암과 그의 벗들이 모여 살던 파고다 공원 근처에서 의기투합하는 벗들과 서로 어울려 뒹구는 모습은 단연코 아름답다. 백탑(白塔)에서의 청연(淸緣)!
만약 내가 언제고 벗들과 함께 웃고 토론하며 노래하고 뒹굴며 그야말로 의기투합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하게 된다면 이 이름을 본따 붙이려고 단단히 기억해 둔다.
백탑청연<白塔淸緣>!

고미숙은 극진한 애정을 담아 연암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암의 감수성, 필력, 강철같은 명랑함, 행동력, 세계성을 향해 열린 도저한 열정... 은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 보인다. 고미숙은 또한 최근 그녀가 심취한 현대철학의 개념에 비추어 연암을 읽고 있는데, 그 문장도 아름답고 철학용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 내 재주로는 다 옮길 수 없으니 한 번 꼭 읽어보기 바란다. 강추!

고미숙과 연암의 몰입과 대응은 200년을 뛰어넘어 사우(師友)가 됨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연암이 고미숙에게 빚을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이 거의 20쇄가 팔린 것을 보면, 고미숙의 우정을 통해 6만 명의 독자가 연암을 발견한 것이다. 나역시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디오니소스를 한 사람 더 만난 즐거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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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피오리나 지음, 칼리 피오리나. 힘든 선택들, 해냄 ,2006


세상에는 구입해서 갖고싶은 책이 있고, 빌려보아도 상관없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단연코 전자에 속한다. 또 세상에는 한 번 읽고 밀쳐두는 책이 있고, 언제고 다시 찬찬히 읽어보고 싶은 책이 있다.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번역의 공도 있으리라. 알짜배기 체험을 박진감있게 끌고가는 칼리의 문장력도 대단하다.


비즈니스와 조직에 관심있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심지어 나처럼 비즈니스와 조직과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고있는 사람에게도 피를 꿈틀거리게 하는 책이다. 공경희가 역자후기에서 말했듯, 아무 것도 모르고 행한 조직생활을 ‘제대로’ 시작해보고 싶게 한다. 칼리의 책을 통해 엿본 비즈니스의 세계는 매혹적이다. 그것은... 피말리게 매혹적이다.


1. 칼리는 ‘배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칼리는 모든 것에서 배우는 사람이다. AT&T에서 일하던 사회초년병 시절, 고객을 상대하던 그녀는 깨닫는다. 뭔가를 정말로 이해하고 싶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봐야 한다는 것.


어린 시절 칼리의 어머니는 늘 파티 손님에게 질문을 던졌고 대답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그녀도 그렇게 했다. 그녀는 질문하고 들어주는 방식으로 친구들을 빨리 사귀었다. 나중에 이것이 훌륭한 경영수단임을 알았다. 그 사람을 알기 위해 질문함으로써 존경심을 표하고, 잘 들음으로써 단단한 결속을 얻게 된다. 그녀는 항상 많이 질문하고, 대답을 평가할 수 있도록 ‘숙제’를 충실히 했다.


구소장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상대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색을 하지 말아라. 단지 질문을 하라. 준비가 철저하지 않다면 상대방은 질문만으로도 허물어진다.


2. 칼리는 ‘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스스로 잘 배우는 사람이었기에, 다른 사람에게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칼 리가 다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동원한 방법들은 현란할 정도로 다채롭다. 누군가 대신 써 준 것이 아니라면, 이 자서전 곳곳의 금싸라기같은 명언들은 정말 대단하다. 모든 챕터를 간략하고 인상적인 글귀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277쪽에 나와있는 두 가지 인용구가 그것을 증명한다. 칼리는 HP 직원 전부가 공유할만한 슬로건으로 다윈의 말을 인용한다.
“살아남는 것은 가장 강한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다.”
슬로건은 쉽고 강력해야 한다. 변화는 나쁜 것이 아니고, 멈춰 서 있는 것이 위험하다는 소신을 강조하는 데 그 이상 좋은 슬로건이 있을 수 있을까.


직원들에게는 투우에 대해 말한다. 소들이 위협을 받을 때 돌아가는 특정한 자리가 있다. 그것을 ‘카렌시아’라고 한다. 투우가 계속되면 소는 몇 번이고 ‘카렌시아’로 돌아간다. 소는 안전한 곳으로 물러난다고 믿지만, 사실은 자신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리는 셈이다. 소는 점 점 더 쉬운 공격 상대가 된다. 우리가 ‘카렌시아’라고 생각한 곳은 이제 없다.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있는 파트너들에게 남자양말을 사용해서 보여준 해프닝이나-200쪽,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뒷 일이나 전체적인 그림이 아닌, 가장 중요한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방식... -111, 113, 118쪽- 은 그녀가 의사소통의 천재임을 보여준다.


3. 칼리는 ‘승부하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승부사이다. 오만하고 천박한 상대에게는 즉각 상대방의 언어로 받아치는 기술-136쪽, 한국의 접대문화까지 감싸안는 포용력, 보드룸도 불사하며 남성들이 자신을 묵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근성, 그녀는 결코 말로서도 행동으로서도 지지 않았다. 일을 제대로 하는 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지켜왔다.


ACMC에서 과다청구된 접속료를 발견해내는 과정도 그렇지만, HP에 처음 부임해서 그 회사를 진단해내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87개 부문에서 150개의 브랜드를 출시하며, 87개 부문 각자가 유통 채널과 인사팀, 재무팀을 거느리고 있는 방만한 체계, 오죽하면 직원 교육용 내부 웹사이트가 1,500개에 달했으랴. -266쪽


HP는 고객보다는 제품에, 상호의존보다는 독립에, 미래의 성장보다는 당장의 이익에 매달렸다. 결정보다는 리스크에 대한 반감에, 속도보다는 조심성에만 신경썼다. 그만한 대기업에서 그 정도로 기업을 방치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칼리는 어느 현장에서나 분석을 통해 목표를 제시했다. 그 목표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리더가 물러서면, 믿고 따르는 사람이 기운이 빠진다고 했다.


4. 결국 칼리는 ‘리더가 되는 방법’의 전범이 되었다.

이 부분에서는 주옥같은 칼리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인간에게는 동기 부여를 해 줄 목표와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자신감이 필요하다. 그 두 가지는 자존감을 얻고 타인에게 존중받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147쪽”

“리더의 임무는 기술과 능력을 키워서 큰 성과를 이루어낼 역량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한편 가치있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수행할 자신감을 키워주는 것도 리더의 임무이다. -148쪽”

“좋은 리더는 직원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나쁜 리더는 직원들의 경멸을 받는 사람이다. 훌륭한 리더는 사람들이 ‘우리 힘으로 이 일을 해냈다’라고 말하게 하는 사람이다.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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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타 로딕, 영적인 비즈니스

<1> 저자소개

- 아니타 로딕은 1942년 영국의 해변도시 리틀햄프턴의 이탈리아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에게서 과감하고 도전적인 생활태도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 열 살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찍은 6장의 사진이 있는 유태인 대학살에 관한 책을 본 후 이미 10대에 운동가로 각종 시위에 참가했으며, 이런 자신을 배척하지 않은 선생님들께 감사하고 있다.

- 스스로 무정부 상태를 좋아하는 기질이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1960년대에 평화를 부르짖으며 세계를 떠돌아다닌 히피족이었다. 원주민 특히 유목민과 함께 있을 때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하다고 말하는 자유인이다.

- 이 책에서는 ‘기업의 윤리적 책임’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고, ‘일반적인 경영’에 대해서는 거의 나와있지 않지만, 그녀는 비즈니스의 귀재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대한 기업 ‘바디샵’을 그토록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이상적이면서 비즈니스에 소질이 없는 사람에 대한 극단적인 예가 있다. 그녀가 미국에서 프랜차이즈를 모집했을 때, 바디샵의 사회적 활동 때문에 많은 사회운동가들이 사업신청을 했다. 그 중에는 비즈니스에 너무 소질이 없어서 시트콤의 소재가 될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일을 저지른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일까지 생기는 것이다.

- 아니타 로딕에게서는 전략가적 기질도 엿보인다. 주로 좋은 목적을 위해 쓰였고, 아마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천부적인 것이겠지만. 걸프전반대 캠페인에 대해 전문경영가의 반대에 부딪쳐 회사 내에서 찬반토론회가 벌어졌을 때 아니타는 스스로 자기 주장을 역설하 지 않고 참전경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에 대해 말하게 한다. 결국 그 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 그녀에게서는 타고난 선전선동가적 기질도 느낄 수 있다. 바디샵의 전 매장에 포스터는 물론 인용구를 크게 써 붙여놓았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도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는 인용구들은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크리스마스 시즌에 바디샵 매장에 걸려있는 19명의 오고니족 투사의 얼굴이란 상상만 해도 극적이다.
그녀는 이미지와 스토리텔링을 선전에 활용할 줄 안다.

- 그녀에게는 ‘덩어리’ 혹은 ‘화신’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집약된 열정이 있다. 무슨 일이고 했다 하면 아이디어가 넘쳐나며, 즉각적이고 세부적인 추진력이 뒤따르며, 끝내 자기 목적을 관철시키고야 마는 ‘이념과 실행의 열정덩어리’이다.

- 결과적으로 아니타 로딕은 상업적인 성공을 통해서 사회적 활동을 실천하며, 기업의 영성에 대해 기본적인 질문과 해답을 제공한 살아있는 사례를 제시하였다.

- 경영학 교육에 영성을 도입하는 것, 사람들을 멸종위기에 처한 환경으로 데리고 가서 환 경 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생태계 여행 등 그녀의 아이디어와 실험은 계속된 다.

<2> 소감

책에 실린 아니타 로딕의 사진은 마치 원주민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강인한 피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반짝거리는 눈, 자신있게 드러낸 주름살에서 야성이 보였다.
책에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그녀가 자유와 평화의 상징인 히피 생활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 그녀의 기질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아니타의 둘째 딸 샘 역시 3대에 걸친 개성을 보여준다. 샘은 캐나다 밴쿠버의 드라이버라는 곳에서 몇년동안 살았는데 그곳은 밴쿠버 거리에 버려진 각종 쓰레기를 청소하고 고쳐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시스템을 가진 곳이다.

타고난 직관과 행동성을 가진 아니타가 사업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호구지책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고객들이 빈 화장품 용기를 가지고 오면 거기에 리필해 주는 것도 사실은 아니타에게 돈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바디샵은 엄청나게 성공했고, 아니타는 그 성공을 거머쥐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한 두번의 행운은 찾아오는 것같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 행운을 발판삼아 그 다음 단계로 올라서지 못한다. 오히려 기회가 지나간 다음에야 아, 그것이 내 인생의 기회였구나, 하고 깨닫는다. 일본인이 지은 자기계발서 중에 인상적인 제목이 있었다. ‘바보들은 기회가 와도 붙잡을줄 모른다’
아니타는 사업의 성공을 통해서 사회적인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바디샵에서는 인간의 생사에 관련된 물건을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가치가 없는 기업에 가치를 부가할 것인가 하고 그녀는 묻는다. 결국 그녀는 세 가지 통로를 통해서 자신의 일과 기질을 완벽하게 통합시킨다.

첫째는 바디샵 내부에서의 윤리적 실천이다. 동물 실험한 성분을 구입하지 않으며, 불법으로 벌목한 나무를 사용하지 않으며, 바디샵이 구입하는 어떤 것도 인권을 유린하는 정부를 지지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 납품업체조차 사회적 감사와 동물 보호 환경 보호 감사를 받겠다고 동의해야만 계약을 체결하였다.

둘째는 소규모 원주민 공동체와의 직거래사업이다. 아니타는 소규모 경제활동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가난한 주택지구인 이스터하우스에 소프워크스를 세웠으며, 그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브라질의 한 여성 협동조합과 바바수 오일을, 가나의 여성 협동조합에서 시 너트 버터를 공급받는 등 경제적으로 소외된 세계 여러 지역과 직거래를 함으로써,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제3세계의 여성들에게 경제적인 기회는 돈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그것은 근본적인 자아 존중심을 드높이고, 교육 보건 문화적 연속성을 촉진시키고, 과거를 보호하는 동시에 미래를 형성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것이 돈의 본래적 의미이다. 돈은 그렇게 생명과, 인간의 근본적인 존엄을 위해 쓰일 때는 신성하다. 힘이 있다. 지나치게 풍부해서 차고 넘치게 되면, 돈의 위력을 잃고 추해진다. 아니타도 지적했듯이 많은 기업가들은 놀랍게도 ‘결핍’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현명한 부모라면 의도적으로라도 요즘 아이들에게 ‘결핍’을 체험하게 해 주어야 하리라.

세째는 전쟁반대, 자본의 횡포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한 각종 캠페인 및 직접지원이다. 이 부분에서 아니타의 상상력과 행동력은 굉장하다! 놀랍다! 실로 대단하다!
1000여명의 노숙자들을 판매원으로 등록시킨 <빅 이슈>는 그 자체가 잡지로도 성공적이거니와, 노숙자 문제해결에도 탁월한 사례를 남겼다. 그야말로 ‘머리와 심장과 몸이’ 함께 움직여야만 얻을 수 있는 성과이다.

석유다국적기업 셸의 무차별한 개발사업에 저항하는 나이지리아 원주민 오고니족을 지원한 이야기 역시 감동적이다. 아니타는 우선 오고니족 지도자 켄의 석방을 요구하는 편지쓰기 캠페인을 벌였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오고니족 협회가 조직활동을 할 수 있도록 사무집기를 제공하고, 오고니족 대표부가 UN 인권 소위원회에서 연설할 수 있도록 나이로비에서 제네바로 오는 항공료를 지불했다. 일단 한가지 목표를 정하면 즉각적이고 전면적으로 가동되는 아니타의 실행력은 거의 동물적인 감각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지속적인 활동은 - 비록 켄사로 위와와 동지들은 처형되었지만 -1997년 셸로 하여금, 인권과 지속적인 발전을 회사 정책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는다는 개정된 경영 헌장을 내놓게 만들고야 만다.

나는 아니타를 읽으며 <대담>에서 가졌던 약간의 거부감이 설명되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니타처럼 , 인생은 신성하며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지극히 간결한 원칙을 가지고 그처럼 엄청난 활동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학자들은 연구와 지식으로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들이지만, 나의 평가는 건강한 상식에 기초한 실천가로 기우는 셈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기업의 윤리적 기초’에 중점을 두어 읽기도 할 것이다. 나는, 강하고 독특하며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인간 아니타에게 더 관심이 간다.
‘나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며, 심지어 작년의 나와도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밖에는 없다. 죽으면 갈 곳도 여행할 곳도 없다.’ ‘덧붙일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가치를 덧붙일 수 없다.’ ‘일에 가치체계를 부여함으로써 일을 재창조할 필요가 있다.’ ‘재미와 열정, 사회적 관심을 일상 생활의 일부로 삼는 한편,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격을 좁히도록 꾸준히 노력할 것’ .....
그녀의 어록을 보면 아니타가 이 홈페이지에 모인 우리 모두의 이상이고 대모이며 동지인 것을 알 수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나는 이 책에 대해서 이 꼭지에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오히려 이다음에 만일 내가 책을 내게 된다면, 아니타처럼 한 페이지를 다 사용해서 인용구를 꾹꾹 눌러 써 주리라, 그럼으로써 내 의견에 많은 지원부대가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외롭지 않음을 웅변하리라, 아이디어를 얻어왔다. 한 가지, 바디샵의 포스터에 대한 사진은 더러 있는데 사진에 대해서는 조금 인색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명의 오고니족 투사의 얼굴이 그려진 현수막과, 바디샵과 직거래를 하는 소규모 원주민 공동체들, 그리고 아니타가 여행한 그 많은 여행지의 사진이 보고 싶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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