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6. 6. 15. 18:39

 

 

대학 4학년 때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 간 적이 있다. 이미 몇 번을 드나들어 익숙한 강원도 산간마을로 가는 길에 전에 없던 냇물이 생겨 있었다. 싯누런 흙탕물이 요동치며 흘러가는데, 폭도 제법 넓었다. 농촌활동 답사를 가던 길이라 일행은 나와 후배 두 명, 어찌 할까 잠시 망설이던 나는 저쪽까지 연결된 파이프 같은 것을 붙잡고 물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조심조심 내딛던 발길이 익숙해지자 후배들에게도 출발하라고 손짓을 했다.

 

그 순간, 한복판이라 더욱 거세진 물살에 의해 내 몸이 번쩍 들렸다. 조금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한 물살이었다. 나는 두 팔로 파이프를 붙든 채로 속절없이 매달려 있다가, 이게 무슨 사태인지 머릿속이 정리되기도 전에 파이프를 놓치고는 둥둥 떠내려가기에 이른다. ! 이렇게 죽는 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인지 느리고 담담하게 그런 생각이 스쳐갔다. 그 때 변덕맞은 물살이 나를 언덕 쪽으로 밀어주어서 나는 살아났다. 후배가 무식해서 용감하다는 평을 내려주었다.

 

무식해서 용감하던 시절에는 삶과 내가 유리되는 기분이 든 적이 없다. 나는 늘 무슨 일인가 벌렸고, 그 일의 새알심과 찌꺼기를 골고루 맛보며 또 다음 관심사로 옮겨 갔다.

 

한 장의 사진이 생각난다. 그 때 소읍에 살던 우리는 한 미술교사가 자발적으로 연 단기특강에 모였다. 그 난로는 무얼 먹고 열을 내 주었을까? 연료는 기억나지 않지만 커다란 맥주통 모양의 주물난로가 있는 중학교의 교실, 대부분 교사인 예닐곱 명 사이에 내가 끼었다. 그 중의 한 사람 L에게 나는 마음이 갔다. 최강의 내향성인 것이 분명한데도 입담이 좋아 어디에서나 좌중의 중심이 되던 그는 두 어 달 미술학원을 다니다가, 구겨놓은 검정비닐봉지를 그리라고 하는 바람에 관두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날의 사진이 한 장 남아있다. 아담한 체구의 지도교사만 서 있고 다들 앉았는데, L과 내가 난로를 중심으로 브이 자를 그리고 있다. 흔히 하듯이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제각기 반대편으로 상체를 기울이고 있는 것. 나는 그 브이 자가 좋았다. 행여 가까워질세라 경계라도 하듯 동시에 서로를 의식한 기울기가 좋았다.  나이 들어 스치는 연심은 이래서 좋으리라. 굳이 확인해볼 필요도 없이 긴가민가 하는 이심전심이 최고로 짜릿하다. 비가 내리는 탓인지 겨울방학을 맞이한 호젓한 교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시간이 못내 그립다. 그림을 그리고 싶고, 누군가 보고 싶고, 그래서 교실로 모여들었던 몸짓이 그립다.

 

삶이 축소되고 있다. 아직은 괜찮지만 좀 더 축소되면 치명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온통 삶 뿐이던 시절을 떠올리다 그런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알게 되었다. 삶은 어디에 있는가? 무언가 하고 싶다는 마음 속에 있다. 세상에서 제일 풍요로운 자연을 품고 살면서도 평생 고달픈 농민들이 나를 불러대, 커다란 배낭을 메고 시오리를 걸어 들어가던 산길에서 나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여럿이 몰려간 노래방에서 쳐다보지도 않고 노래책자를 밀어주던, 딱 그만큼의 마음씀에도 황홀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 날을 그 날답게 했던 것들을 소환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끔벅끔벅 아가미나 열고 닫는 물고기처럼 아무런 감흥이 없어서 안 되겠다. 정말이지 아직은 괜찮지만 5년후, 10년후 어떤 상황에 부딪힐지 겁이 나서 안 되겠다. 단순한 나는 하고 싶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열 가지의 안 되는 이유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하고 싶다는 마음에 집중하여 일을 벌리곤 했다. 그게 나인데 경험과 연륜으로 두루뭉술해지다 보니 인생의 마법을 잃어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떠날 수 있을 때까지 떠나고, 불 지르고, 비틀어라! 네 자리는 원래 알콩달콩 모여사는 저들 안에 있지 않았다. 너는 아주 작은 영토라도 스스로 불 질러 마련한 화전에 만족하였으며, 지극히 사소한 일이라도 기존의 관점을 비트는 일에 매료되는 자이다. 매혹되는 것은 너의 천성이고, 지름신은 너의 힘이었으니 부디 꽂혀라! 저질러라! 시도하고 또 시도하여 마침내 이루어라!

 

나다운 것을 잊어버릴 때 삶이 멀어지니, 이제 새삼 기질을 불러내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나이 들고 있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 더.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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