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6. 6. 1. 22:16

 

 

 

한 여성이 있다. 50년이나 편집자로 일하며 필립 로스, 노먼 메일러, 잭 캐루악 등을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펴낸 전설적인 편집자이자 작가이다. 그녀 다이애너 애실이 90세에 쓴 회고록 <어떻게 늙을까>를 읽었다. 90세라니... 고인돌 만큼이나 고리타분하게 여길 사람도 있겠지만 그럴 일이 아니다. 8년간 자유롭게 연애하던 배리와의 사이에 성적 긴장감이 사라지자 친구가 되어 40년을 함께 살았으며, 이후 배리가 젊은 여자와 사귀게 되자 기꺼이 그녀를 받아들여 셋이 함께 생활한 2년 동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는 호탕함은 젊다고 해서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보다 열 살만 많아도 외계인 취급을 하기가 쉽다. 나이 든 사람들을 지나치게 예우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것은 극심한 연령차별주의가 드러난 단면이 아닐지? 그러나 내가 도달할 연배를 먼저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진짜 인생이 녹아있고, 그 중의 일부분을 선취할 수 있다면 훨씬 지혜로워질 것이다. 자신은 선천적으로 모성이 약하며,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갖지 않는 이유는 종교인 형제들보다 똑똑해서라고 말하는 등 누구보다 직설적인(젊음의 대표적 징후가 아니든가) 편집자도 나이들어 90세가 되었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사람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잘해야 중년으로 여겨지는 녹슬지 않은 지성을 드러내는 그녀의 글이 나는 좋았다.  외모는 됨됨이는 아니라도 그 사람을 평가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게 보이기 때문에 외모가 중요하다는 대목에서 찔끔했고, 갈수록 소설이 시들하다는 대목에 공감했다. 소설에 비해 논픽션에 대한 관심이 더 오래 가더란다.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다 아니까 시들해졌지만 사실들은 아직도 알고 싶기 때문이다. 남자와의 관계에 다소 튀는 관념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부모에 대해서는 통념을 실천한 것도 믿음이 간다. 

‘나는 인간이란 모름지기 젊어서는 자식을 돌보고 늙어서는 자식의 돌봄을 받는 게 자연의 이치라 생각한다. 어리석거나 삐딱한 부모들은 그 이치를 따르지 않지만 내 어머니는 어리석거나 삐딱한 분이 아니었다.’
 
저자가 70세일 때 나흘은 어머니 집에서 같이 지내고 사흘은 따로 지내는 식으로 92세의 어머니를 돌보기도 했는데, 그 어머니가 운명한 병원의 영안실에서 일하는 남자들의 시선을 다룬 대목은 이 책의 백미이다. 


‘(영안실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죽음이란 그 과정이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아주 일상적인 사건이라 수선 피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죽음이란 할 말이 아무것도 없기에,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보통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인간에게 불가피한 종말은 오래도록 잘 산 인생의 시의적절한 결말이지 비극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내 마음 속 오래된 두려움이 옅어진다. 성자는커녕 종교도 없는 여성노인이 하는 말이 나의 초월지수를 일시에 올려준다. 

친정엄마는 82세로 저자보다는 젊지만 노인은 노인이다. 팔십평생 실수라곤  없고 억지 한 번 부리지 않은, 온유하고 합리적인 분인데 당신 집을 아들에게만 물려주시겠다고 한다. 당연히 서운하다. 자식 중에서 언니와 나에게 많이 의지하시면서 그리 하시니 언니는 잘 살기나 하지 나는 어쩌란 말인가!^^   며칠 동안 서운함에 부대끼다 보니 엄마와의 관계에서 맞이한 최초의 시험이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처음이자 단 하나의 실수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모녀라는 이름의 운명을 경시하는 것일 게다. 

어젯밤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 <또 오해영>에서 기가 막힌 대사에 접했다. 음향감독 역할을 맡은 에릭이 어려서 같은 일을 하던 아버지에게 소리가 왜 좋으냐고 물었고,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얻은 뒤에 이어지는 대사다. 마침 제주여행중이라 애월의 해변에서 혼자 보던 드라마라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다이애너 애실의 책, <또 오해영>, 제주... 삼박자가 어우러져 인생의 시험 하나를 중화시켜주니 인생은 참으로 오묘하다.

“아빠는 사라지는게 좋아요?”
“응”
“왜요?”
“사라지는 걸 인정하면 엄한데 힘주고 살지 않거든.”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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