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5. 4. 3. 12:22

 

                                  56세 무렵의 엄마, 눈썹이 반밖에 없는 내가 엄마를 닮았음을 처음 깨닫는다.

 

 

 

 

                                                                            요즘 엄마 모습

 

 

 

 

늙어서 세 평짜리 방에 갇혀버리는 여정, 老母라는 이름의 기록은 우리 인생의 가장 절박한 다큐멘터리이다.

-- 한설희, “엄마 사라지지 마에서

 

 

젊은 날의 엄마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 믿지 못할 나이가 되도록 늘 엄마는 최고의 지원군이었는데 맘먹고 떠올리려고 해도, 정황이 생생한 몇몇 장면에도 엄마의 얼굴은 없다. 첫 아이를 낳을 때 절개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환자용 침상에 누워 수술실로 떠밀려가는 내게, “아무 것도 걱정할 것 없다! 엄마는 배수술 두 번이나 했어!” 하시던 엄마. 얼마 전까지 그 장면은 엄마와 관련된 최고의 기억이었는데 이제 그것도 희미해졌다. 나는 어리고 엄마는 좀 더 젊던 시절로 기억을 옮겨 가 보지만 마찬가지다. 1 때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왔다 나서는데 봉투를 찔러주던 엄마, “아이 참, 아이가 보네요.” 민망해 하던 선생님의 모습은 생각나는데 엄마는 아니다. 대학 저학년 때 등록금을 내러 학교에 오신 엄마가 나를 찾으려고 학무과에서 시간표를 물으니 경계부터 하더라며, 불륜에 얽힌 여대생을 찾는 것으로 여긴 것 아니냐는 탁월한 해석을 내놓던 엄마. 하얀 바탕에 잔잔한 무늬가 놓인 긴 원피스, 그 날 엄마가 입었던 옷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옷 위에 엄마의 얼굴은 없다.

 

엄마는 마치 처음부터 늙어 있었다는 듯 늙은 얼굴만 익숙하다. 내가 엄마의 얼굴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15년 전부터다. 엄마 나이 65,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이다. 한 번은 내가 살던 지역으로 다니러 오셨는데 지나가던 이웃의 원장이 엄마 얼굴이 어쩜 그리 좋으시냐며 감탄해 마지 않는다. 그리곤 나와 엄마를 번갈아 보는 폼이, 딸이 엄마만 못하다는 소감에 이어 나를 다시 보기까지 하는 눈치였다. 내가 느닷없이 흔치않은 결혼을 한 만큼 어디서 굴러먹던 뼈다귀인가 싶다가 엄마의 훤한 얼굴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은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은 엄마가 바로 옆에 있어도 엄마 얼굴을 바라 볼 수가 없다. 올해 80이 되시자마자 가파르게 진행되기 시작한 노화가 가슴 철렁해서이다. 컨디션이 좋고 막 씻고 난 직후에는 그래도 익숙한 내 엄마인데, 피곤한 상태에서 인상이라도 찌푸리시면 너무 낯설고 두려워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고 느긋한 성정답게 훤하고 편안하던 인상이 사라지고, 세월이라는 마귀가 반쯤 점령한 얼굴에 놀라 가슴이 후들거린다. 더구나 그 모습으로, (볶음밥에) 감자 넣어도 되는데...., (샐러드에) 양배추 넣어도 되는데....처럼 하나마나한 말씀만 하시는 터라 당최 대꾸를 할 수가 없다. 마침 그 재료가 없어서 안 넣었을 뿐 그걸 누가 모르냐구요. 더구나 그 말이 나올 줄 뻔히 알았을 정도로 수없이 계속된 말이라면!

 

언제부터인가 엄마의 동선은 바짝 오그라들었다. 자식과 TV, 그것이 전부다. 동네 친구들이 다 경로당으로 집합했는데 엄마는 경로당이 성에 차지 않는다. 젊어서 밥술깨나 먹던 엄마는 아들이 잘 안 풀려서 어깨 힘이 빠지고, 반대 처지에 있던 분들의 목소리가 커진 것이 아니꼬운 지도 모른다. “자식인데.... 자식인데....” 모든 일상을 대체한, 독경같은 소리가 답답하다. 어쩌다 다니러 오시면 거실에서 거의 종일 틀어놓는 TV 소리가 방문을 닫아도 웅웅거리는 소음이 된다. 며느리가 TV 좀 그만 보라며 리모콘을 집어 던졌다고, 친척 한 분이 전화에 대고 울먹거렸다는 소리가 어떤 상황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나는 리모콘을 집어던지지는 않았지만 묘한 심리에 빠졌다. 지금의 나와 20년 후의 내가 함께 움직이는 듯한 환각이다. 엄마의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핀잔을 했거나, 손녀딸이 곰살맞게 잘 하다가도 어쩌다 짜증을 부릴 때, 마치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은 것처럼 가슴이 철렁하다. 두렵고 당황스럽고 아프다. 사실 요즘은 핀잔도 하지 못한다. 엄마에게 허락된 시간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아!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 엄마의 얼굴에 예고된 죽음이 드리울 때, 더구나 그 모습을 나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질 때, 나는 전처럼 퉁을 주기는커녕 엄마의 여생을 풍요롭게 해 드리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찬다. 엄마는 20년 후의 나이므로.

 

엄마에게 가장 커다란 한은 무엇일까? 그리하여 엄마 얼굴을 슬슬 피하는 주제에 이렇게 본격적인 질문을 품게 되었다. 그건 아마 경제적인 자립이 아닐까, 하는 대답이 쉽게 나온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온 엄마는 바깥에서 돈 버는 행위에 대한 존경심이 강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오직 자식들이 찔끔찔끔 드리는 용돈에 의지해서 요리조리 나눠 써야 하니 더해졌을 지도 모른다. 송편을 잘 만드니, 좀 더 일찍 떡집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꺼라는 말씀도 자주 하신다. 강원도 어디쯤에 가서 엄마가 좋아하는 나물을 캐서 오일장에 나가는 거다. 아니면 건조기를 사서 요것조것 말려서 직거래를 터 드리는 거다. 팔십인생 최초의 경제활동 프로젝트! 상상이 마구 달린다.

 

워낙 성격이 좋으셔서 연로하시면서 그 흔한 우울증의 기미 한 번을 안 보였지만 지금부터는 또 다르다. 당신이 더러 말씀하시는, “이제 죽을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수사가 아니라 기정사실이 된 상황을 어떻게 버텨야 할까. 여행과 명상, 두 가지는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침대에 누운 채로 죽음을 기다리고 싶지 않다며 유서를 품고 여행다닌다는 할머니들을 책 속에서 접한 적이 있다. 나도 따라 하리라 단단히 기억해 두었는데 엄마를 모시고 세상 구경을 시켜 드리고 싶다. 엄마는 미국이며 필리핀, 일본 등 비행기를 타 본 편이지만 경험은 언제나 현재형이 아니던가. 엄마의 여생을 TV 앞에서 끌어내고 싶은 것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어디 절집에 가서 두 어 달 생활하는 것도 좋겠다. 엄마, 하실 만큼 하셨어요. 이제 자식에 대한 애착을 끊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요. 오늘 하루, 마음 편하게 살았으면 그게 전부에요. 나를 거쳐 간 인연, 내가 몸 담아온 세상의 살아있는 것들 모두 평안하라고 기도할 수 있으면 더 좋구요. 이맘때는 스님처럼 살라고, 그게 최고라고 책에 다 나와요.

 

그나저나 당장 해 드릴 수 있는 건 해외여행인데 이 노인네, 승낙을 할지 모르겠다. 터키에서 돌아와서 더워지기 전에 곧바로 가려면 6월초 베트남이 적당해 보이는데......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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