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4. 9. 17. 02:03

나는 나영석PD와  비슷한 시기에 어른의 배낭여행에 대한 구상을 떠올렸다. 작년 5월에 이탈리아와 주변국을 여행할 때의 일이다. 딸과 함께 40일을 다니는데, 이제나 그제나 심한 길치인지라 딸 뒤를 따라다니다 보니 무력감에 빠질 때가 많았다. 아무리 길눈이 어둡다해도 고생하며 내 발로 찾아다녀야  기억이 되고, 조금씩이라도 요령이 생길 텐데, 워낙 딸의 판단이 빠르다보니 약하나마 방향감각이 아예 쇠퇴해 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탈리아 아래에 있는  섬나라 몰타(Malta)에 갔는데, 이거다 싶은 영감을 받았다. 나처럼  마음은 간절하나 이것저것 걱정이 많은 중년의 배낭여행학교를 몰타에서 할 수 있다면 아주 멋질 것 같았다. 

 

몰타의 인구는 40만으로, 제주도의 6분의 1 면적을 가지고 있다.  일단 국가라기보다는 일개 도시에 가까운 규모가 만만하고, 사회 안전망이 잘 확립된 것 같았다. 자정이 넘어 도착했는데 공항에서 일괄적으로 택시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 창구 직원이 요금을 받고 행선지를 적어 기사에게 준다! 이것은 작은 일 같아도  안정된 행정력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이 일은 깊은 밤 낯선 곳에 떨어진 여행자에게 대단한 신뢰감을 주었다. 게다가 영어를 사용하니 어학연수까지 겸할 수 있다. 어떻게하면 희망자를 모아 배낭여행을 훈련하고, 공저까지 쓸 수 있을까 끙끙 앓고 있는데, 2013년 7월 tvN에서 "꽃보다 할배"가 방송되었다.

 

대성공이었다. 가정이나 직장, 드라마 어디에서도 배경에 불과한 노년층의 배낭여행 컨셉이 이렇게 인기를 끌 줄은  몰랐다. "꽃보다 할배"의 후속프로그램도 연이어 성공을 거두는 가운데, 꽃할배의 포맷을 미국 NBC에 수출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미 지상파로의 진출은 처음이라니 대단한 성과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회사의 자원으로 이것을 가시화하여,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PD라는 직업이  대단해 보이고, 그 중에서도 나영석PD의 존재감에 박수를 보낸다.

 

하나의 현상이 인기를 끄는 것은 대중의 숨어있는 욕구를 반영했다는 뜻이다. 갈수록 세상이 젊어지고, 독자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만큼 이제 배낭여행이 대학생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50대의 여행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중년이나 노땅들이 배낭여행을 가는데 한 TV 프로그램의 성공이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대중문화라는 것이 참 흥미롭다. 아무튼 나는 올해도 중년배낭학교에 대한 꿈을 꾼다.

 

 

꼭 몰타가 아니어도 갈 곳은 많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간다면 오페라와 미술에 대한 탐구가 주를 이룰 것이요, 터키의 페티에(Fethiye)에 간다면, 화요장터에서 장을 봐다가  욜류데니즈 해변으로 피크닉을 가면 좋을 것이다. 아! 페티에! 나는 페티에의 화요장터에서 천국의 환상을 보았다. 인구 7만여명의 작은 지역에서 어찌 다 먹으려고 그렇게 어마어마한 청과물을 쌓아 놓았는지, 게다가 그것들은 어찌 그리 싼지, 이 곳에서는 마치 배 고픈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주먹만한 감자가 1kg에 500원, 베개만한 바케트도 500원, 세수대야만한 양배추가 2000원, 각종 치즈가 1kg에 10000원이니, 나눠 먹기도 좋지 않겠는가!

 

욜류데니즈 해변은 또 어떻고! 그 해안은 몽돌해안이었다. 파도가 밀려와서는 차르르 차르르 소리를 내며 몽돌을 쓰다듬고 돌아섰다. 차르르 차르르 물결이 깎고 다듬어 완벽한 계란 모양을 만들어 놓은 세월이 기가 막히고, 차르르 차르르 몽돌 사이로 빠져 나가는 소리에 홀려 한참을 앉아 있는데, 이쪽 저쪽 봉우리에서는 자꾸만 패러글라이더가 해변으로 내려 앉았다. 순간 시간이 멈추고 마음이  풀어진다. 완벽한 평화. 이렇게 완벽한 평화가 가능한데 눈곱만한 일로 볶아대며 살았구나. 옹졸하지 말자. 받아들이자. 아니면 흘려 버리자. 저절로 대인이 된다.

 

어디를 가든 어른이 간다면 짧은 시간에 한 군데라도 더 점찍으려고 서둘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라도 머물러 귀기울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껏 우리의 여행경험이 20대의 배낭여행 중심이었기에 쌓인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온 날이 일천하니 시야가 좁고, 마음은 바쁘고, 체력이 되니, 빡센 일정으로 유명 여행지를 섭렵하는데서 그쳐, 여행지는 한정되어 있고, 경험은 깊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닌지? 이제 한 시절 살아낸 사람들이 여행을 간다면, 천편일률적인 여행편식을 답습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더 많이"가 아니라 "더 깊이"를 추구하며, "유명한 곳"이 아니라 "나만의 의미가 있는 곳"을 발굴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떠나기 전이나 돌아와서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음악과 미술, 건축과 역사, 문학 같이 클래식한 분야와 연결되든, 아니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개인적인 것이든, 반드시 가 봐야 할 곳을 많이 만들수록 여행에서 얻을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권태도 스트레스다. 모든 것에 익숙해져 더 이상 가슴 뛸 일이 없어졌다면 여행이 특효다. 여행은 가장 안전한 일탈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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