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술, 아름다운 경영, 지와채, 2004

원칙적이고 인간적인 경영, 2000년 국내 최초로 미국 나스닥에 상장, 카이스트에 300억 기부 등 확실한 족적을 남긴 경영인 정문술의 인상은 지나치게 평범했다. 책 표지에 실린 사진은 보통 기술자의 모습이었다. 물론 깐깐해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가진 사람은 너무 많다. 가장 보편적인 대한민국 가장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 평범해보이는 인상 어디에 정문술은 그 많은 것을 꾸려넣고 있었을까. 게다가 그는 그 많은 것을 다 어디에서 배웠을까. 자기 말마따나 어려서 공부에 뜻이 없어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보결로 들어갔고, 기술이나 경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원광대 종교철학과를 나온 사람이!


그는 육군에 근무하던 중 행정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정보부로 특채되어 18년간 근무한다. 당시 그의 보직승진이 초고속이라 주변에서는 든든한 빽이라도 있는줄 알았다고 한다. 정문술은 자신의 빽이 ‘호기심’이었다고 말한다. 군에서 접한 기획관리와 문서관리, 행정시스템의 합리성과 효율성에 매료되어 무슨 일이든 찾아서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부터 그의 특질이 드러난다. 기획관리와 문서관리에 매료될 일이 뭐가 있는가, 얼핏 봐도 매혹적인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정문술은 학과공부와 상관없는 타고난 현장성 학습인이다. 자신의 호기심에 걸려든 일에 깊이 몰입하여 따져묻고 공부하여 기어이 자기영역을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다. 중앙정보부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서양화 한 점에 매료되어 시작했다는 그림공부 역시 그렇다.


그는 독학으로 자신의 감각을 키우고 그림을 사들여야 할 시점을 알아차렸다. 한 점 두 점 사모았던 그림은 회사가 어려울 때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의 학습기질은 계속해서 발휘된다.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중앙정보부에서 강제해직된 정문술. 43세, 군대생활만 해보았을뿐 사회생활 경험이 없는 그는, 쭉정이 금형공장을 인수받아 퇴직금의 절반인 2천만원을 날려버린다.


그리고 1983년, 그는 반도체 분야에 뛰어든다. 가까운 미래에 반도체가 크게 각광받을만한 사업이라는 상식 정도가 사전지식의 전부였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젊은 시절 그를 사로잡았던 호기심과 열정 패기 낭만 모험심 승부근성을 공무원 서랍에서 다시 꺼내 들고, 그는 다시 겁이 없어지기로 작정한다. 다짜고짜 반도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악전고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음으로 개발한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는 실패였다. 개발을 하긴 했는데, 기계의 속도가 숙련공의 4배가 걸렸다고 한다. 18억을 삼킨 바보장비를 만든 것이다.


“죽읍시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이 없구려.”

비감한 말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준 아내. 평생에 걸친 아내의 침묵과 순종이야말로 자신의 모험심과 배짱의 진짜 배후였고 뒷심이었다며, 정문술은 책의 끝부분을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여자인 나로서는 평생을 침묵하고 순종해야 하는 배역이 영 이해되지않고 마음에도 들지 않지만, 성공하는 경영인의 입장에서는 필수적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동반자살의 지경까지 갔던 정문술은, ‘나는 용궁에 갔다 온 사람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촌스럽고 진부하지만 자신이 경험한 절망의 나락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비유이기 때문이다. 없음의 극한을 경험해 보았다는 것이다. 돈 때문에 죽을 고비까지 넘겨야 했던 그는 언젠가 반드시 돈을 극복해보겠다는 보복심리를 갖고 살아왔다. 신의와 의리로 여봐란 듯이 성공해서 그렇게 번 돈을 또한 아낌없이 포기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겠다, 그래서 인간이 그까짓 돈보다 얼마나 우월하고 귀한 존재인지를 끝내 증명해 보이리라, 이를 악물고 맹세해가며 버텨왔다는 것이다.


절망의 나락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학습인 정문술, 그는 정말 자신이 생각한대로 되었다. 그깟 돈이 없어서 꿈을 접어야 하는 사람들이 가여워, 인정할만한 사업계획을 갖고 오는 사람에게 아낌없는 투자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카이스트에 300억을 기부하여, 아름다운 경영과 진정한 부자의 표상을 보여주었다.

카이스트에 300억을 기부할 때도 진정 정문술은 정문술다웠다. 기부를 하더라도 열정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한창 때 하고 싶어, 자선에 대한 공부를 한 결과이다. 생명과학과 정보기술과 기계기술을 서로 융합하여 학제간 연구를 할 수 있는 첨단학과를 신설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이오시스템학과’, 나같은 문외한은 발음조차 어색하나 ‘과학콘서트’의 저자 정재승이 ‘바이오시스템학과’ 조교수인 것을 보니, 조금 친밀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러고보니 정문술은 명예욕이 대단한 사람이다. IT업계에 대한 파격적인 지원으로 ‘벤처대부’라는 칭호를 얻었거니와, 富를 제대로 쓰는 방법을 터득한 것도 그렇다. 매스컴의 떠들썩한 칭찬에 대해 그는 말한다. 추하지 않게 늙어가며 남은 인생을 편안하게 살아보겠다는 또 다른 노욕老慾의 발로일 뿐이라고. 그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 욕심이 많고 욕심의 폐부를 꿰뚫어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욕심에 파묻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필생의 역작이자 꿈의 공간이라고까지 여겼던 ‘미래연구센터’의 준공식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은퇴했으면 온전하게 물러나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카이스트의 정문술 빌딩 준공식에도 불참한다. 기부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고향사람들의 청탁을 피해 고향갈 일을 줄이느라고 부모님 산소까지 이장했다는 대목에서는 무섭다는 생각까지 든다. 자기다움을 관철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버티는 모습 앞에서, 아무 것도 지킬 것없이 허비하며 살아온 내 모습이 부끄러울 뿐이다.


나이든 자의 욕심이라 해서 정문술의 그것을 어찌 노욕老慾이라고 부르랴. 우리 사회가 나이든 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는 모든 탐욕과 어거지 그래서 노추老醜가 되는 것들로부터 그는 진정 멀리 있다. 젊은 누구보다 직관적이고 젊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짱짱한 정문술, 한 분야에서 도통하면 다른 분야에까지 전이가 되는 것인가. 그의 문장은 평생을 글쓰는 일로 살아온 수필가의 문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거기에 뜬구름잡는 선문답이 아니라, 진흙탕 싸움에서 멋지게 승리한 경험담을 풀어놓으니, 알짜배기 인생교훈이 되었다.


보라, 정문술의 어록을, 책상 앞이 아니라 전선에서 몸을 굴려 살아남은 자만이 줄 수 있는 빛나는 교훈이다. 들어라. 젊은이여. 젊은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은 널널하지 않다. 언젠가는 소멸되는 것이다. 미래를 향해 자신의 꿈을 위해 아낌없이 투신하지 않고는 언젠가 빈 손을 쳐다보는 막막함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래는 맞이하거나 준비하는 게 아니다. 확신을 갖고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 나이가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열정과 위험을 사랑한다. 그 아름다운 무모함을 죽는 날까지 곁에 두고 싶다.


부자를 탈피함에도 나름의 취향이 있고 기질이 있을 법하다. 나는 벤처인이다.


만사 8할만 추구할 일이다. 100%에 도달하기가 쉽지도 않거니와 100%를 추구하는 많은 이들은 기껏 쌓아 온 것들마저 탕진하거나 하다 못해 세인의 빈축을 산다. 섭생攝生이 그렇고 치부致富가 그렇고 권력이 또한 그렇지 않은가.


오동나무는 세 번 잘라 줘야 하는 법이네. 기를 죽여야 크게 자라지.”


오동나무 부분에서 조금 울었다. 지금 제대로 잘려있기 때문이다. ^^ 누군가 나를 크게 키우기 위해 내 기를 죽이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문술의 체험과 통찰이 집약된 부분을 옮기며 긴 글을 맺기로 한다. 내가 지금 이 책을 만난 것도 하나의 전조이다. 늦게나마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한 척후병이다. 나도 언젠가는 ‘정문술’ 처럼 말할 수 있겠지. ‘운이란 지독한 집중력으로 일궈내는 필연’이라고.


“아무리 사소한 트랜드라 할지라도 반드시 전조가 있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조그만 암시라도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제때 포착하기 위해서는 늘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할뿐더러 무엇보다 길목을 제대로 지키고 서 있어야만 한다. 정확한 길목을 지키고 서서 눈을 부릅뜨고 있다보면 분명 척후병이 포착된다. 척후병이란 곧 ‘조짐’이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는 길목은 특정한 매체나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가 주로 흘러다닐 만한 ‘요충지’를 뜻한다.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척후병을 잡게 되면 그때가 바로 결정의 순간이다


직관이란 개념도 내게는 우연이란 개념과 동류다. 일정한 트랜드를 관찰하다 머릿속에 불쑥 떠오르는 어떤 예감, 또는 복잡한 상황을 순식간에 단순화시켜 실무와 의사결정에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직관력있는 사람이다. 그는 길목을 제대로 지키고 서서 늘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직관에 대한 믿음도 생기는 것이고 그 믿음을 밑천으로 과감한 행동에 돌입할 수도 있는 것이리라.”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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