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읽기의 즐거움, 망각과 자유  - 강신주


‘피리, 거울, 어린아이’의 공통점은? 셋 다 나를 비우고 외부와 접하는 대로 정직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속이 꽉 찬 피리는 소리를 낼 수 없듯이, 사람도 자의식으로 꽁꽁 뭉쳐 있으면 타자와 부딪혀 공명할 수가 없다.  거울 또한 이전에 비춘 대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더 이상 거울 노릇을 할 수가 없다. 과거에 어떤 모습을 비추었든 철저하게 지금 마주친 존재에 반응해야 거울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는 모든 것을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시선으로  본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십자가에서 인공위성까지 모든 것이 장난감이다.


장자에 대한 강신주의 책을 두 권 째 읽는다. 얇지만 복습효과가 커서 좀 더 울림이 크다. 어렵고 장엄하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던 장자가 이렇게 쉽고 재미있는데다가 내게 꼭 필요한 내용일지 몰랐다. 스승이든 사람이든  준비가 되면 나타난다고 했던가, 책도 그런가 보다. 강신주가 읽어주는 장자는 그야말로 ‘소통’의 화신이었다. ‘소통’과 요즘 유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은 다른 것이라고 그는 거듭 강조한다. 막혔던 것을 터서<소> 물 같은 것이 흐르도록 연결하는 것<통>이므로 자못 혁신적이라는 얘기다.

오랫동안 무언가를 공동창작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해 왔다. 양인자, 김희갑 부부가 단지 금슬좋은 부부였다면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보통 부부가 공유하는 것 말고 또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아내가 가사를 써 놓으면 남편이 작곡을 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자기 심경을 잘 표현했는지 놀라울 정도라는 양인자의 말이 잊히지가 않는다.  ‘알고 싶어요’, ‘립스틱 짙게 바르고’, ‘킬리만자로의 표범’ 처럼  가사에 착 붙은 선율로 명품이 된 가요들이 그녀의 말을 증명해 준다.  그리고 릴케와 로댕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이상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생각뿐  내 이상을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해 본 적이 없다. ‘혼자’ 하는 일에는 약간의 노력이나마 하고 있지만 ‘함께’ 하기 위해 자의식을 죽여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내가 그렇게 부러워하던 이상의 초입에 들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서로의 창조성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서로의 창작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거나 아예 무언가를 공동창작하는 사람들이 제일 부럽다고 노래를 해 왔는데! 이제 이상을 실험하는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피상적인 노래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집요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을 때, 장자 아니 강신주가 내게로 왔다.

성인의 도로 성인의 재주가 있는 이에게 알려주는 것 또한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알려주고서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삼일이 지나서 ‘천하’를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가> 이미 ‘천하’를 잊어버린 후 나는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칠일이 지나서 ‘외부대상’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가> 이미 ‘외부대상’을 잊어버린 후 나는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구일이 지나서 ‘삶’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이미 ‘삶’을 잊어버린 후 <그는> 조철朝徹할 수 있었다. 조철한 후에 <그는> 獨을 볼 수 있었다. 독을 본 이후에 <그는> ‘고금’을 없앨 수 있다. (...) 이런 사람은 타자에 대해 마중하고 맞이하며 훼손하고 이루어주지 않음이 없다. 그것을 일러 영령攖寧이라고 한다. 영령이란 타자와 복잡하게 얽힌 뒤 이룬다는 것을 말한다.


‘조철朝徹’이란 아침에 여명이 터지는 경관을 말하니, 조철의 상태에 이른 마음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그 존재성에 입각하여 바라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

 

‘견독見獨’은 자신의 유한성을 철저하게 자각하는 상태이다. 자신의 생각만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유아론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고금을 없애다’의 뜻은, 어떤 기억도 담아두지 않고 어떤 기대도 하지 않음으로써 , 시간의식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시간의식을 제거한다면 타자와 조우할 때 그 결에 맞추어 마중하고 맞이하며 훼손하고 이루어주지 않음이 없게 된다. 이처럼 타자와 소통하고 공존하는 상태를 ‘영령攖寧’, 얽혀서 안정된다는 뜻이다.


나는 전에 자기확신이 강한 것이 자랑스러웠다. 정혜신이 만 명 이상을 만나 심층상담을 해 보니, 진짜 자기확신이 강한 사람이 희소하더라는 이야기를 할 때 은밀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나의 확신은 오직 나 하나를 위한 것이었다. 내 영토의 신민은 오직 한 사람 나 뿐이었다. 고의는 없었지만 급한 성격에 수시로 내 잣대를 휘두르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독불장군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타자의 비중이 나이와 비례하여 커진다 싶었을 때,  나의 확신이라는 것이 외부와 얽히며 검증되지 않은,  ‘타자가 배제된 유아론적’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러니 ‘견독’까지는 온 셈인가? 이제 주위 사람을 내 판단이 아닌, 그 사람 고유의 존재성에 입각해서 바라봐줘야 할 도전을 느낀다. -내 감각으로는 ‘견독’ 다음에 ‘조철’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이것이 이루어져야만 나의 오랜 꿈인 ‘영령’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타자와 복잡하게 얽힌 뒤 이룬다!’ 는 대목에서 장자의 현대성을 느낀다.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단어 idiot의 어원이 ‘혼자 지내다’인 것것처럼, 혼자는 의미가 없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어울려 서로에게 가치있는 것을 이루는 것이 삶의 최대 의미인 거고, 이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여기로 가기 위한 장자의 처방은 오직 하나, “잊어라! 그리고 연결하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만나고자 한다면, 판단력과 선입견, 자의식을 버리고 피리처럼 속을 비우라는 말이다.  어제까지 그에게 가졌던 느낌 같은 것 말갛게 지워버리고 ‘지금, 여기’ 모습 만을 거울처럼 비추라는 것이다. 지나친 의미중심, 목표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아이처럼 모든 것을 놀이로 대하라는 말이다. 이처럼 나를 비우고, 나를 죽일 때 새로운 내가 탄생하고, 새로운 관계구성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만한 이해와 신뢰로 동앗줄처럼 꽁꽁 얽힐 때 무슨 일이고 가능하지 않겠는가. 아하! 나는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사람들이 그토록 자기를 찾기 위해 애쓰는 것은 자기를 버리기 위해서인가 보다. 나를 세워라, 그리고 나를 버려라! 장자를 읽다가 득도하려나 보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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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말 좋은 포스팅인 것 같아요. 지금의 저에게도 굉장히 와닿는 말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참 어려운 것이 '함께'하는 일 같아요.. 아집도 많고 부족함도 많은 인간인지라 저를 잘 알고 넓은 마음으로 잘 받아주는 주변의 몇몇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부닥치기도, 융화하기도 하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랑은 안맞는 것 같은 느낌의, 말투의, 생각의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대해야 하는건지... 그들과도 기분 좋게 잘 지낼 수 있는 것이 '영령'인 걸까요? 모두에게 노력이 있다면 언젠가는 가능한 일인게 맞는 걸까요? 상대도 내가 맘에 들지 않고, 맞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잘 지내고자 각자가 서로를 그냥 인정해버리고 지낸다면 가능도 하겠지만... 어느 한 쪽이 그러한 마음이 아니라면.. 또 다른 한쪽이 그냥 참는 일로만 끝나는 건 아닌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개선될 수 없는 관계라면, 그냥 피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참 어려운 것 같아요..ㅠㅠ

    2011.07.27 16:04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하하, 지금 심리다독님이 써 준 말이 정확하게
      내 심경하고 똑같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봐도 되겠네요.

      생각을 조금 더 해 보자면
      나를 잘 받아준 사람도 내가 꼭 이쁘고 자신과 잘 부합해서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이 자신의 스타일이나 포용력 덕분에 내가
      편해진 것을 생각하면,
      내가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너비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뭐 그 정도 생각이고,
      나이들면서 눈곱만큼씩 ^^ 나아지고는 있지만
      내게도 여전히 이론입니다요.

      2011.07.28 06:39 [ ADDR : EDIT/ DEL ]
  2.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저도 참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예요. 남이 해놓은 일은 내 성에 안차기에 혼자서 하고마는. 그러다 보니 십칠년을 같이 산 아내와도 아직 벽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아내의 모습속에 인정하지 못하는 부분이 남아있는 거죠. 모든 이를 존재성에 입각해 바라보는 것. 매번 생각하고 바꾸어야지 해도 잘 되지 않는 일입니다. 저도 장자를 읽어봐야겠습니다 ^^

    2011.08.12 23:45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와우!! 쉐아르님, 잘 지내시지요?
      블로그를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나이에^^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마냥 오픈할 수도 없어 어정쩡한데
      쉐아르님의 등장은
      예전에 좋았던^^ 시절을 불러일으켜 참 좋네요.

      장자도 문학적 텍스트라 해석이 중요할듯해요.
      강신주의 관점 괜찮더라구요.

      2011.08.13 11:17 [ ADDR : EDIT/ DEL ]
  3.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망각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겼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책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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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2019.03.28 17:2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