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강신주


“원장님은 열 번을 만나도 처음 보는 사람 같아요.”


오래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확한 표현이다. 나는 모든 것을 낯설게 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나 자신과 내 자식들마저 객관적으로 살펴보는데 능하니, 제3자는 말해 무엇하랴!  철학이 삶을 낯설게 보는 것이라는 풀이에 접했을 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면 나도 이미 하고 있던 거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해였다. 그것도 부끄러울 정도로 완벽한 오류였다.  강신주의 책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론으로 읽힌다. 삶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철학이라면, 우리 삶 자체가 거의 무한에 가까운, 타자와의 연속적인 만남이기에 타자란 가장 심각한 철학적 문제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는 타자가 배제된 담론을 유아론적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연히 남들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무심한 습관으로부터, 공동체의 규칙을 절대화하는 시도까지 모두 포함된다.

사실 우리는 관계 때문에 얼마나 자주 부대끼는가? 너무 계산이 빠르고 걱정이 많아서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은 딸과, 반대로 너무 물정을 몰라서 천진무구하기 이를 데 없는 아들을 비롯해서 너무 세속적이거나 에너지가 약하거나  완벽주의인 사람들에게 내가 느낀 불편함은 나와 같지 않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던가? ‘타자가 배제된 담론이 유아적’이라는 한 마디에 나는 초반부터 세게 얻어맞는다. 왜 그들이 나와 같아야 하는데?  나의 혼자놀기는 타자와의 차이를 수용하지 못한 편협함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강신주는 이런 편협함이 위대한 형이상학에도 적용된다고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하이데거의 존재, 노자의 도, 주희의 태극’이 ‘그리스의 폴리스, 게르만의 전원생활, 중국의 고대국가, 유학의 가부장제 사회’라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규칙을 절대 불변의 진리로 고착화하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삶을 조망할 수 있게는 해주지만 여전히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성격을 갖는 정신적 지평을 유일하고 절대적인 지평으로 간주하는 것은, 마치 이 세상에 여행지라곤 단 한 곳밖에 없다는 식의 병적인 발상이라고 그는 질타한다.

장자는 이런 시도들이 주는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다고 한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이것이 강신주가 해석하는 장자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장자 개인이 쓴 것이 아니다. ‘내편’은 비교적 장자의 사상이라고 여겨지지만 그조차 여러 차례 편집된 것이고, ‘외.잡편’은 장자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은 후학들에 의해 이루어진 논문집의 형식이다. 그렇기에 ‘장자’ 곳곳에는 역대 편집자들의 주석을 비롯하여, 장자 본연의 사상과 구별되는 경향이 두터운 먼지처럼 끼어 있다. 그래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떤 흐름을 붙잡느냐에 따라서 180도 다른 해석도 가능한 터이고, 나는 강신주가 읽어주는 장자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도 이것을 몇 번이나 강조한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을 일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해석한 연구자들이 많은데, 이것은 장자를 신비주의자로 만드는 치명적인 오독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내가 장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무위’ 혹은 ‘거침없는 초월’ 정도였다. 그러나 강신주가 말하는 장자의 꿈이란, 타자가 배제된 사유 즉 유아론에 불과한 형이상학적 사유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꿈에서 깨어나야만 한다는 주장은 타자를 관조의 대상으로 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어떤 타자와도 직대면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관조의 세계와는 달리 삶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수한 타자들과 마주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자의 서막을 장식하는 유명한 ‘대붕’이 구만리까지 상승하여 내려다 본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아래 땅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먼지가 날리며 생물들이 서로 숨을 불어 주고 있구나.


생물들이 서로 숨을 불어 주고 있구나. 이 부분이 가만히 가슴으로 들어 온다. 장자는 초월주의자가 아니었다. 반대로 어떤 초월적인 가치에도 현혹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했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도道가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어 기를 쓰고 찾고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파악한 반면 장자는 ‘도는 걸어가야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 말은 상당히 선동적이고 현대적이다. 어떤 위대한 사상이나 유용한 조언도 내 발걸음으로 확인해야 내 것이 된다는 말이다. 관념적이고 학문적인 탐구로서가 아니라, 실천하는 가운데 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작은 봉우리 하나에 도달했다고 해서 결코 끝이 아니며, 부단한 자기극복 혹은 경계의 횡단으로 읽어도 좋다.


또 이 말은 ‘타자와의 연속적인 만남’을 뜻하는 것으로도 보이니 해석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아무튼 나는 강신주가 읽어주는 장자가 좋다. 장자가 공자의 말을 빌려 하는 말을 들어보자. 공자가 제자 안회에게 하는 말이다.

네가 위나라에 들어가 그 새장 안에서 노닐 때, 이름 같은 데에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받아 주거든 유세하고 받아주지 않거든 멈추어라. 문도 없애고 언덕도 없애서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부득이한 일에만 깃든다면 괜찮을 것이다. ... 너는 날개가 있는 것이 난다는 것을 들어보았겠지만, 날개가 없이 난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너는 앎으로써 안다는 것은 들어보았겠지만, 알지 못함으로써 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 인간세


문도 없애고 언덕도 없앤다는 표현에 깜짝 놀란다. 타자와 부딪치는 장면마다 어떤 선입견이나 판단을 하지 말고 오감을 열어놓고 반응하라는 말로 들린다. 미세한 판단이 쌓여 급기야 마음문이 닫히는 경험을 우리는 얼마나 오래 해 왔던가! 그래봤자 그 판단이라는 것은 얼마나 사소하고 이기적이며 그나마 확인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는지! 마음을 비우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한다면 얼마든지 새로운점을 발견할 수 있고, 그로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알지못함으로써 안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강신주는 이렇게 풀이한다.  문이란 타자에게로 이르는 유일한 통로를, 언덕은 먼 곳을 조망하기에 좋은 높은 장소를 의미, 문이나 언덕은 어떤 초월적 지평을 상징. 부득이-내가 멈출 수 없는 것 즉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바꿀 수 없는 타자성을 상징하니,  타자를 읽으려는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타자에 몸을 맡기는 방법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으면 타자가 아니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도 타자가 아니다. 어떤 연결도 매개도 존재하지 않기에 타자인 것, 그런 타자와 소통할 수 있다면 날개가 없이 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 조화롭고 즐겁도록 하고 타자와 연결하여 그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밤낮으로 틈이 없도록 하여 타자와 더불어 봄-春-이 되도록 해야 한다.


타자와 더불어 봄! 이것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희열이요, 내게 부과된 최고의 도전인 것을 알겠다. 이것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내 삶이 충만한가 아닌가가 결정되니,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 현대철학의 쟁점이 ‘타자와 차이’라더니 2천 년 전의 장자를 이런 관점에서 읽어낸 강신주가 대단하다. 계속해서 책도 읽어 보겠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비우고 사람을 대하는 시험에 나를 들이밀어야 할 것 같다.  잊어라! 그리고 연결하라!  저자의 메시지를 깊숙이 안고 가는 것이, 좋은 책을 써 준 저자에게 건네는 감사의 표시이리라.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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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삼 장자를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글!

    2011.07.22 13:44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잘 지내지요?
      저는 장자는 물론 철학책도 맘먹고 처음 읽었는데
      아주 좋아서 출발이 좋네요~

      2011.07.23 11:16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