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책2011. 3. 21. 18:28

 
정덕현, 숨은 마흔찾기, 엘도라도, 2011


이렇게 글을 편하게 쓰는 사람도 흔치 않다. 어찌나 술술 읽히는지 앉은 자리에서 번쩍 읽어치웠다. 이런 사람은 생각하는 것을 토해내기만 해도 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어림도 없다. 그역시 조급증에 빠진 자신을 1년이나 다독거려 책다운 것을 만들어준 편집자에게 감사를 건네고 있는 것. 그렇게 보면 이 편안함은 남들보다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고친 노고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의 서두는 독보적이다. “여기 어려운 거 하나두 없어유, 조금도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다가와도 돼유~ ” 읽는 이를 즉시 무장해제시킨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이걸 마셔 말어, 봉지커피를 꺼내들 때마다 고민한다.

“어 저 아파트 아직도 그대로네?”

고등학교 동창들은 1년에 딱 한 번 만난다. 그것도 망년회에서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잡지를 기억하는가.

“연기는 아직 멀었네.” <아이리스>에 등장하는 보기만 해도기분이 좋아지는 김태희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내게 아내가 툭 쏘아댄다. “연기?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야. 김태흰대.


글의 문턱은 만만하고 본문도 편안하기 그지없지만 읽고나면 단단한 덩어리가 느껴진다. 이 저자, 국문과 출신으로 소설가를 꿈꾸었으며 사회활동에 꽤나 헌신했던듯하고, 직장편력도 좀 되는듯 싶더니 그게 다 글쓰기 내공으로 쌓였구나. 특히 일상의 몇 장면을 연결하여 의미를 이끌어내는 재주가 뛰어나다. 김태희 타령을 하는가 싶더니 몸짱아줌마로 넘어가, 그녀가 운동의 성별차이와 나이를 동시에 뛰어넘어 이 시대의 변화속도를 종과 횡으로 뛰어넘었다고 분석하는 식이다. 작은 잡지의 편집장 시절, 다른 사람들의 원고를 대신 써주던 역할을 침묵의 장기 ‘간’에 비유하는 솜씨는 절묘하다. 잡지는 거의 자기 손길로 써지고 다듬어진 것들이었지만 거기 자신의 존재감은 없었고, 그 때부터 그는 회사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끔 포털 메인에 뜨는 TV평을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의외로 첫 책은 ‘마흔’에 대한 것을 펴냈다. 그는 급성백혈병으로 사망한 친구 태준이와 보험회사 소장으로 일하는 병수를 보며 이 책을 쓸 생각이 들었다고.


아마도 친구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중년의 나이를 실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제 앞으로 몇 십 년을 지나면서 매년 한 번씩 있는 이 자리에서 한두 명씩 사라질 것이라는 기시감.

보험소장 병수, 회식하면서 한번씩 돌려줘야 실적이 오른다고 했다. 사교춤이 말야 사람관계하고 똑같아. 당겼다가 밀었다가를 흐름에 맞춰서 잘 해야 멋지게 돌아간다는 거지. 그거 잘 못하면 발 밟히기 십상이다

친구의 이른 죽음은 삶의 끝을 보게 만들었고, 남은 친구는 칼날같던 젊음에서 아득히 물러나 누구나 툭 차면 잘도 굴러가는 둥글디 둥근 공이 되어버렸지만 그의 어조는 결코 나른하지 않다. 마흔이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이별하며 살았던 청춘의 과잉’을 지나, ‘이상과 현실을 맞추며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삶을 위해 조율해온 서른’도 지나, ‘자신의 인생 전체가 가진 의미를 생각하는 준비된 시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문장 행간마다 이 시대의 문화비평, 대안적인 삶의 방식, 나눔과 공존의 가치관 같이 굵직한 내용이 배어 있다.



시간이 아닌 미션 중심으로 삶을 계획하면 시야 자체가 달라진다, 남자와 군대이야기는 트라우마와 프라이드 사이에 존재한다, 디지털은 감탄은 하게 하지만 감동은 없다, 디지털이 채워주지 못하는 아날로그 정서가 중년들만의 경쟁력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아날로그 정서를 즐기자, 다이어트의 문제는 그저 그 사람의 몸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 위에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연관되어 있는 삶의 균형의 문제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삶의 균형을 맞춰나가려고 할 때 그것을 어떤 구호 같은 단기적 목표가 아니라 삶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우리의 몸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우리의 균형 잡힌 삶은 지구라는 존재가 현재 겪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줄지도 모른다.



내가 속도감있는 문체에 사회학적인 분석이 들어간 글을 좋아하는구나 다시 한 번 확인할 정도로 신이 나서 읽었다.  정서과잉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활기찬 탐구심과 도전의식을 보여주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는 글이 참 좋다.


이 책은 대중적인 글쓰기의 전범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대중문화에서 뽑아내는 담론이 만만치않다. 또 이 책은 건강한 글을 쓰기위해서는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친구는 물론 동시대를 사는 인간에 대한 동지애가 풍부한, 튼튼한 자의식과 세계에 대한 책임감을 지닌 저자가 믿음직스럽다. 우리가 팔아야 할 것은 주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말이 새삼 다가 온다. 요즘 성장발달론에서 이론적으로 접한 ‘마흔’을 실제 사례에서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고보니 남자의 마흔에 대한 책은 제법 있는데 여자의 마흔에 대한 책은 거의 없다. 글통삶의 누군가 주제로 잡아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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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_+ 참, 혹시 이 책 안읽어보셨으면 추천이요~.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저: 김선주> 좋아하시는 종류의 책이지 싶어서요. ^^ /

    2011.03.22 08:1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오잉? 연배상으로는 조금 일러 보이는데요?^^
      ㅎㅎ 내 취향까지 살펴주고 고마워요.
      메모는 벌써 해 놓고 아직 읽지않은 책이네요.

      2011.03.22 21:26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