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놀이2011. 1. 7. 09:43
 

데이비드 길모어, 기적의 필름클럽, 솔 2009


열 여섯 살짜리 아들이 도저히 학교를 싫어한다. 눈앞의 공부와 전혀 무관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한 아빠가 제안한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으면 그만 다녀도 돼. 일을 할 필요도 없고, 방세를 낼 필요도 없고, 매일 다섯 시까지 자도 좋아. 단 마약은 안돼!  일주일에 영화 세 편을 나와 함께 보는 거야. 너에게 공부는 이것뿐이야.”


아버지는 아들이 마지못해 끌려가는 삶을 살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기꺼운 호기심을 가지고, 자기 몫의 인생을 만들어가기를 원했을 것이다. 학교에서의 실패가 사회적인 실패를 의미하는 세상에서 무엇으로 아들에게 그것을 준비시켜 줄 것인가. 영화평론가 아버지는 그 수단으로 영화를 택한다.


아버지가 택한 첫 영화는 프랑수와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였다. 그 다음 날 ‘후식’으로  ‘원초적 본능’을 보여 주었다니 사춘기 아들을 대하는 문화의 차이가 흥미롭다. 아버지의 커리큘럼은 테마를 가지고 이어진다. '공포영화 특별전’ 혹은 ‘숨은 보물 찾기’ 같은 식이다. '정중동' 靜中動 도 있었다. 배우가 움직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관객의 시선을 끄는 연기를 하는지 보는 것인데,  이 테마를 위해 '하이눈', '카사블랑카', '대부'가 동원되었다.


‘재능발굴’ 단원은 좀 더 흥미롭다.  신통치 않은 영화 속에서 주연도 아니면서 30초만 보고도 “저 남자 대체 누구야?” 하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배우들이 있고,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 이야기도 나온다.  스물넷에 경험도 일천한 그녀가 그레고리 펙과 유연하게 코믹한 연기를 주고받는 모습은 불가해한 예술적 성숙이었다고 아빠는 말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데뷔도 그에 못지않다. 그 역시  스물 네 살에 TV영화 '대결'로  ‘무모할 정도로 엄청난 천재의 존재’를 널리 알린다. 스필버그 자신이 그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억해내기 위해 2,3년마다 ‘대결’을 다시 본다고 했을 정도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대담한 영화였다고 한다. 몇 년 후 그는 ‘대결’ 한 편의 경력만으로 ‘죠스’의 감독을 맡는다.


이 책은 사춘기를 관통하는 아들의 성장을 위해 전력투구한 아버지의 기록이다. 아버지는 한 손에는 영화를 그리고 다른 손에는 연애상담을 들고 있다. 짧고 속도감있게 정리해주는 영화평도 재미있고, 캐나다 청소년들의 사생활과 가족관계를 엿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들 제시는 3년 동안 세 명의 여자친구를 만나고 그 중 두 명에게 깊이 탐닉한다. 아빠가 그토록 경고한 마약도 두 번 한다. 아버지로 말하자면 아들의 생모, 딸의 생모, 그리고 지금의 아내가 모두 다른 사람이다. 그렇지만 아들의 교육을 위해 전처와 의기투합하는 모습은 함께 사는 부부 못지 않다. 제시의 부모는 사내아이는 아버지와 함께 커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서로의 집을 맞바꾸기까지 한다. 아버지의 옥탑방은 190센티미터가 넘는 사내아이가 하루 종일 머물기에는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시로 만나 대화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셋이서 여행도 간다.  아버지의 현재 부인도 제시에게 좋은 상담역이 되어 준다. 문화는 사람의 인성까지 변화시키는 것일까, 우리와 사뭇 다른 모습에 어리둥절해지는 가운데 오매불망 아들을 챙기는 아버지의 부정은 똑같아서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 온다.


아들과 영화를 보며 갖가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아버지에게도 행복했다. 그들의 대화 소재는 실로 다양해서 60년대, 비틀스,  잘못된 술마시기와 제대로 술 마시기, 레베카, 아돌프 히틀러, 리처드 닉슨, 간통, 트루먼 카포티, 레즈비언, 코카인, 헤로인, 문신, 자니 카슨, 냉소에 대해 이야기하던 때에 대한 아버지의 술회는 사뭇 감동적이다.


내가 직장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인생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바로 내 옆에,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으니까. 비록 인생의 종착점이 저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은 너무나 황홀했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아들은 아버지가 처음 영화평론가가 되었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 독자를 위한 쪽지시험 같은 것이지만 아들과 아버지가 문답을 나누는 장면도 흐뭇하기 그지없다.


“내가 시험해보고 싶은데 괜찮겠니?”

“괜찮아요.”

“오래 생각하지 말고 바로 대답해라. 프랑스 뉴웨이브가 가져온 세 가지 변혁을 말해보겠니?”

“저예산...

유동 카메라...

영화가 스튜디오를 벗어나 거리로 나온 점?“

“뉴웨이브 감독 세 명만 대보겠니?”

“트뤼포, 고다르, 에릭 로메르”

“뉴웨이브를 불어로는 뭐라 하지?”

“누벨바그”

“하워드 혹스는 좋은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가 뭐라고 했지?”

“세 개의 좋은 장면, 그리고 나쁜 장면이 있어서는 안 됨”

“마지막 문제. 이걸 맞추면 내가 저녁 외식을 쏘지. 신 할리우드 운동을 이끈 세 명의 감독 이름은?”

“프랜시스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브라이언 드 팔마...”


그리고 아들은 느닷없이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수년 전 자신을 패배자로 만들었던 공포의 과목들에게 재도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결정하게 된 데에는 연애와 신통치않은 직업 탓도 있었지만 영화의 힘이 크지 않았을까? 자기 발로 뚜벅뚜벅 걸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얼 쇼리스가 최하층 빈민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쳐 이룬 일을,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영화를 봄으로써 성취하였다. 아들은 대학으로 가고, 아버지는 이제 아들이 마리화나에 쩐 모습으로 택시를 운전하는 상상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물질은 정말 중요하지만 언제까지나 부동의 1위는 정신이기를 바라는 나같은 사람에게 소중한 실험이다. 경제적인 풍요, 혹은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근시안적인 목표는 무기력과 무의미에 포위된 청소년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글쓰기에 대한 것도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제시가 랩을 작사하는 과정에 있었던 일이다. 처음에 제시는 상투적인 사회성-마약밀매업자와 코카인에 중독된 매춘부가 나오는 쓰레기인생에 대해 노래했었다. 이웃사람들을 완벽하게 그려낸 거라고 하면서.


“우리 가사 어때요?” 제시의 질문에 대고 아빠는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해”

슬쩍 칭찬을 해 준 다음에 이렇게 말한다.

“한 가지 제안해도 되겠니? 네 삶과 조금 더 관련있는 것을 쓰도록 노력해야 할 거야. 네가 강렬하게 느끼는 것, 말하자면  레베카?”


레베카는 제시가 막 헤어진 여친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제시는 레베카는 아니지만, 새로운 여친인 클로에로 인한 혹심한 고통을 노래하게 된다. 그 노래는 격렬한 비난과 애원 속에 마치 투명한 심해어처럼 자신의 내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껍질을 깨고 삶을 울부짖는 제시의 노래에 아버지는 커다란 감명을 받는다. 아이가 이제 더 이상 십대가 아니며 자기 몫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것, 그 과정에 아버지로서 응분의 역할을 했다는 감회에 다음과 같은 것이 섞인 감정이 아니었을까.


영화 ‘청춘 낙서’에서 리처드 드레이퍼스가 우연히 접한 아주 매력적인 찰나 경험 같은 것이다.  그는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굵고 쉰 목소리에 사로잡혀 불현듯 우주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깨닫는다.


그건 어떤 장소가 아니라, 뭔가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욕망의 구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갈 수 있는 어느 장소의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존재하고 싶은 자리의 개념이다.


아버지는 멋들어지게 자기가 존재하고 싶은 자리를 지켰고, 우리는 경쾌하기 그지없는 영화입문서와 십대자녀에게 접근하는 독창적인 실험사례를 얻었다. ‘‘훌륭한 글쓰기’ 단원은 미처 시작하지도 못했다’ 는 아빠의 조용한 되뇌임은 마치 나를 위한 것 같다. 걱정마시라. 내가 할 테니까.^^  이 세상의 수많은 제시, 내 영혼의 분신들을 위하여 라이팅클럽에 대한 책을 쓰고 싶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욕망이 내 안에 있어서 참 좋다. 본문에 의하면 그것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에 닿는 일이므로.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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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ink Floyd의 보컬과 기타를 연주하는 David Gilmour에 대한 얘기를 쓰신 줄 알고 한참을 읽었는데, 제가 놓친 부분이 있었나 하고 다시 읽었습니다. 동명이인. ^^

    2011.01.07 22:1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거의 다른 블로그를 방문하지 않는 제 탓입니다만,
      요즘 너무 블로그이웃과의 소통이 막혀있다 생각하던 차에
      아주 반가운 방문이십니다.
      길모어를 한때 닉네임으로 쓰셨을 정도이니
      그러실만도 했겠네요.^^

      2011.01.08 10:48 [ ADDR : EDIT/ DEL ]
    • 어? 어떻게 아셨지? 길모어(gilmour)를 닉네임으로 썼던 것을....흠흠.

      2011.01.08 11:42 신고 [ ADDR : EDIT/ DEL ]
  2. 기적의 라이팅클럽. 기대되는데요. ^^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두려운 것은 그런것이예요. 할 얘기, 해줄 얘기가 없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지금은 끊임없이 엄마에게 '옛날얘기 해주세요~'하고 조르는 네살배기 아들이 자라면 어떤 얘기를 나누게 될까.. 얘가 힘들어하거나 방황할때 나는 무엇으로 조용히 이 아이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을까..
    함께 여행하고, 함께 영화보고, 함께 책읽고, 함께 걸을 수있는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제 아이들에게. 함께 글도 쓰고요...^^

    2011.01.13 22:5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아들애가 중2쯤 되었을까, 영어단어를 자꾸 물어보는 거에요. 왜 사전 안 찾느냐는 내 말에 아들 왈, 물어보는 게 더 빠르다나요. 그 때 내 느낌도 똑순맘과 같았지요. 멀지않아 니가 아는 단어가 나를 앞지를 거야. 나야 이제 코앞에 닥쳤지만 -딸이 한 학기 후에 워킹홀리데이 간다네요-똑순맘은 좀 이른 거 아니에요?^^

      2011.01.14 09:51 신고 [ ADDR : EDIT/ DEL ]
  3. 비밀댓글입니다

    2011.01.14 08:3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