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새알심2010. 11. 21. 14:12

다섯 살 무렵 언니 교과서를 읽으며 혼자 한글을 뗐다고 한다. 취학 전 말을 잘 해서 동네사람들에게서 ‘변호사 시켜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60년대 마포골목 이야기이니 그 수준은 믿을 것이 못 되지만 상대적이나마 언어적 재능이 발달한 기미가 보인 셈이다. 초등학교 3학년때 전학을 했는데 담임선생이 어찌나 쌀쌀맞은지 적응을 못하고 땡땡이를 치기 시작했다. 두 살 아래인 남동생까지 데리고 스케치북이며 기생충약값이며 적절한 잡부금을 타서 군것질을 하며 놀이터를 전전했다. 무심도 하지. 근 한 달이나 지난 후에 담임이 동네 아이를 우리집에 보냄으로써 땡땡이가 들통났다. 죽지않을 만큼 혼난 뒤에 다시 학교에 나간 날,  ‘바야흐로’라는 단어를 넣어서 짧은 글짓기를 하라고 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않은 채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손을 들고 “때는 바야흐로 봄이다”고 말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어 “때는 바야흐로 여름이다” 같은 말들을 해댔다. 모두 내 아류였다.


중학입시가 있던 시절,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대부분이 과외를 했다. 나이가 지긋한 남선생이었다. 한번은 전과목 시험을 보았는데 아직 답안이 도착하지 않은 모양으로 과외선생 임의로 채점을 했다. 며칠 후 도착한 답안에 의해 채점했던 것을 정정해주었는데, 국어과목에서 두 세 개 내 답안이 옳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신사임당이 가족을 그리워하는 심경에 대한 독해문제였는데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이제 생각하면 그 과외선생 꽤 진솔했다. 중2 교내백일장에서 주어진 제목은 ‘가을’과 ‘벗’이었다. ‘벗’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가작을 했다. 그 뒤에도 한 번쯤 더 장원은 못하고 가작을 한 것같다. 그리고 성큼 뛰어 대학2학년 리더십 과목에서 과제물을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다들 원고에 코를 박고 읽다시피하고 있는데, 나는 클라스메이트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내 말로 이야기했다. 내 머리에는 내가 쓴 원고가 다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간강사가 “무언가 압도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대학졸업무렵 전00이가 나를 보고 “너 글써라”고 말했다. 혹시 저자로서 성공하면 그녀를 찾아 옛날 이야기를 하며 내가 쓴 책을 전해주고 싶다.


1991년, 결혼 5년차 불과 35세의 나이로 도의원에 출마한 적이 있다. 야당에서는 후보자를 세우기도 힘든지, 대학을 나와 농사를 짓는 내가 상품가치가 있어보였는지 아무튼 3천만원을 들고 와 어찌나 강권하는지, 못할 것도 없지 하는 생각에 일어난 일이었다. 선거라는 것은 고급거지 노릇과 다를 바 없었다. 표를 달라고 굽신거리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 두 번 다시 할 일이 못된다고 생각했지만 대중연설은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유권자들이 온전히 내 말을 듣기 위해 나를 바라보고, 내 말에 웃고 반응하는 것은 짜릿한 경험이었다. 결혼 8년차, 나는 ‘글쓰기과외가 성행’이라는 신문기사 한 편을 보고 읍내로 나가 글쓰기교실을 차렸다. 농사일과 시집살이에 지쳐 돌파구가 절실했다. 33평 임대료가 4천만원, 강사 한 명을 두고 내가 차량운행하며 수업을 겸했다. 초등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물어서 찾아가 벌린 일이었지만 학원은 꽤 잘 되어서 4년 후에는 종합학원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13년간 학원을 하며 아이들 키우고 먹고 살았다. 어느날 정신차려보니 쉰이었다. 이미 학원운영에는 싫증이 날대로 나 있었고 새로운 목표가 필요했다. 우연히 변경연에 클릭했는데 신천지나 다름없었다. 늘 미운오리새끼처럼 빙빙대며 살았는데 이곳에는 나와 비슷한 기질과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득시글했다. 이른바 ‘창조적 부적응자’들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연구원 과정에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이제 나는 저술과 강의를 주로 하는 1인기업가를 꿈꾼다. 두 번째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것이 내 주된 일과이니 그 첫걸음을 뗀 셈이다. 이 일은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이 일을 통해 재미와 소일과 성장과 생계를 해결한다고 생각하니 엄숙한 기분마저 든다. 그야말로 내 삶 그 자체가 아닌가. 실낱같이 이어져온 작은 실마리에 내 인생 최고의 성취와 기회가 숨어있었다고 생각하니 생의 비밀 한 자락을 훔쳐 본 기분이다. 긴 세월 짧은 인연에 기대어 인생전환을 꿈꾸는 자는 더욱 박박 기어야 하리라.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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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댓글입니다

    2010.11.22 08:05 [ ADDR : EDIT/ DEL : REPLY ]
    • 이제껏 내 모습이란 것이
      자기확신은 강한데 사회성은 약해서 본의아니게
      다른 사람들의 의미를 경시하고 심지어 내게 손내미는
      사람들까지 거부하고, 대신 내 에너지만 방출하는 식이었지요.
      나를 인정해주는 단 한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고마워하고, 그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쓴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거에요.
      좀 더 겸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글쓰기에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도 있구요.

      2010.11.22 09:21 신고 [ ADDR : EDIT/ DEL ]
  2. 비밀댓글입니다

    2010.11.26 23:19 [ ADDR : EDIT/ DEL : REPLY ]
    • 가끔 달아주는 댓글을 보면,
      내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주어서 고맙더라구요.^^
      님처럼 블로그를 열심히 하는 분들은
      의미있는 짧은 순간들을 더 촘촘하게 기억하겠네요.

      2010.11.27 22:50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