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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고 한 번은 가 보려고 했었다. 대학졸업반에 활동다니기 시작해서 졸업후 일년을 살기도 했던 곳, 이제는 닉네임으로만 쓰고 있지만 한때는 내 삶의 전부였고 언제까지라도 잊을 수 없는 곳, 미탄.
변하지 않은 것은 절벽밖에 없었다. 오지에 가까웠던 산촌 마을은 번듯한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하긴 30년이 흘렀단다. 30년! 나는 이 숫자만 입밖에 내어 말하면 동시에 "징그러워!" 하는 말이 따라 온다. 어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30년 세월 저쪽을 추억할만한 나이가 되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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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고기생태전시관 같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이 곳은 원래 이런 곳이었다. 마을에서 생산된 고추 마늘을 서울로 직송하여 팔고, 그 수익금으로 조그만 마을회관을 짓는 중에 찍은 한 장의 사진.





분명히  행정구역은 맞는데 너무나 낯설어 두리번거리다가 강건너 커다란 바위를 보고서야 이 곳이 '그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이 곳 사람들은 깎아지른 절벽을 '뼝창'이라고 불렀다. 독특한 어감이 재미있어서 나도 일부러 불러보곤 하던 바로 그 뼝창이었다. 뼝창아래로 흐르는 강물에서 아침이면 물안개가 환장하게 피어오르곤 했다. 온 동네 농사일을 내 일처럼 거들고 다니다 짬이 나면 그 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먹고, 밤이면 달빛아래 미역을 감았었다.




동네 안 길로 접어들어 가만가만 걷기 시작하는데, 좁은 오르막길이 익숙하다. 모조리 멀끔한 양옥집으로 바뀐데다가 집들이 늘어나기도 해서 생판 모르는 동네에 온듯 덤덤하던 발길에 그리움이 와락 피어난다. 이 길을 수도없이 오르내렸지. 꼬마들을 가르치고 머스매들과 어울리고, 청장년들과 마을살림을 의논하며  오르내렸을 길이 어제의 풍경처럼 다가온다. 이 길 저 편에 그 아이네 집이 있었다. 8남매로 정말 아이들이 많았다.  그많은 아이들이 하나같이 순하고 똑똑했다. 아이는 그 중의 둘째로 나보다 두세살이 어렸다.

활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도 여전히 그 애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냥 안면있는 사이로 살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애의 인생에 온전히 개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던가!   영원히 옆에 있어줄 것처럼 마음을 퍼부으며 아이를 휘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반신반의하던 그애가 마음을 열려고 할 무렵 등을 돌렸다. 이 마을에 오는 발걸음이 그토록 늦어진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30년, 이제는 어떤 기억도 소화할 자신이 생긴 것일까?  나는 언제고 한 번은 가려던 미탄행을 결심했고, 저 길을 올라갈 때만 해도 '불쑥 그 애와 맞부닥뜨린다면 어떻게 처신을 해야할까? '  잠시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한명석이 아니래요?' 민박집 아주머니는 대뜸 내 이름을 불러냈다. 위 사진을 거론하며 그 중에 어떤 옷을 입은 아이가 자기 아이라는 말까지 했다.  아주머니의 눈썰미 덕분에 나는 순식간에 과거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 집이나 두드려 내가 그옛날 아무개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분이 아니었다면 풍경만 둘러보고 그냥 돌아왔을 것이다. 그랬다면 기억 속의 그 아이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고, 이렇게 잔인한 수업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죽. 었. 단. 다. 그것도 17년 전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라고 했다. 좀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인물을 만나면 어찌할까 궁리했던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느라 자주 떠올리지 못했었고, 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기억 속에 묻혀있었을 인물인데도 죽었다는 말 앞에서는 오만가지 감회가 터져 나왔다.




막 제대를 했다는 그의 아들에게 청해 같이 짧은 산행을 할 때도 그렇게 감정이 북받치지는 않았었다. 느릿한 말투며 걸음걸이에 그 시절 그애의 모습이 겹쳐져 깜짝깜짝 놀라며, "미친 놈, 그렇게 대책없지는 않았는데..." 소리가 절로 나올 때도 아직은 이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속속들이 느끼지 못했다.




젊은 친구는 붙임성이 있고 편안했다. 칠족령에 올라 절경을 내려다보며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냇가에 앉아 그애의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도 먹었다. 그시절 내가 한 짓거리를 모르지는 않으실텐데 도시락까지 챙겨준 의연함에 머리가 조아려졌다. 그 때도 그런 분이셨다. 그 많은 자녀를 거느리며 농사일 다 하면서도 대인의 풍모가 느껴지는 분이셨다.

그리고 이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른다. 집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도, 아까 산책 중에도,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하도 울어서 머리가 아프다. 살아있어서 옛날 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회색 스웨터를 걸치고 검은 살결에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모습이 명멸하다 사라진다.  그 와중에도 나는 젊은 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삶에 대해 두려움이 없고 그래서 대책없이 무모했던 젊음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리 온 것일까. 이렇게 어이없는 일에 부딪혀야 하는 이 나이가 싫다. 나이든다는 것은 내가 살아온 것의 결과를 온 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구나. 이 일을 필두로 나는 또 어떤 인생성적표를 받아들이게 될 것인가.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시면 젊은 나이에 그렇게 되는 건지 거기에 내가 책임을 느껴야 하는 건지, 그렇게 빨리 떠나간 그애가 불쌍하고 그 어머니가 불쌍하고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살아 있었어야지! 살아 있어서, 그것도 아주 잘 살아 있어서 내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용서를 해 주었어야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삶을 살다 가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용서임을 나는 알았다. 우리 모두 어리지 않았느냐고, 내 감정에 추호도 거짓이나 부끄러움은 없지만  무책임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날들을 다 거쳐 이렇게 나이가 든 것에 서로 놀라기도 하고 대견해하기도 하며 담소하는 장면을 나는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런 간절함은 그의 죽음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살아있어, 둘다 폭삭 나이들어 적당히 능란해진 모습으로 안부를 나누고 돌아섰더라면 이런 순정한 그리움은 못 겪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인간의 얄팍함에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수업은 죽음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두 번 다시 이런 장면에 놓이지 않도록 누구를 찾아 무엇을 사과해야 할 것인지 돌아보는데 또 눈물이 차오른다. 미안하다, J. 내 인사는 언제나 늦는구나. 부디 편안히 잠들었기를, 내 너를 잊지 않으마. 그 시절 떠꺼머리 머스매의 모습 그대로.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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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용서임을 나는 알았다.] 정말요.

    2010.11.04 08:4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망설임끝에 미묘할 수도 있는 개인사를 펼쳐놓으며,
      내가 말보다도 글에 많이 치우쳐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네요. 남들은 말로 풀텐데...

      2010.11.04 10:02 [ ADDR : EDIT/ DEL ]
  2. 비밀댓글입니다

    2010.11.06 22:39 [ ADDR : EDIT/ DEL : REPLY ]
    • 가슴에 묻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된 느낌이에요.
      지금의 내 시점에서 20대초의 젊다못해 어렸던 모습에 대해 연민을 품다보니
      거의 모성에 가까운 그런 뭉클함이 솟네요.

      심지어 그가 잘못될 무렵을 따져보니, 내가 호의호식하던 시절이 아니라는 것이 위안이 되네요.

      2010.11.07 07:54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