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새알심2010. 8. 28. 09:4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진솔함이 고스란히 느껴질 때가 있다.
코드가 맞는 이유도 있겠지만 가식없는 진정성이 내 마음에 스며들 때,  나는 그 저자를 '진짜'라고 부른다. 
이윤기님은 내게 그런 '진짜 저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저 책 두 어 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내가 그와 같은 진짜 저자들을 얼마나 좋아하고 미더워하고 있었는지
이번에 새삼 깨달았다.

세상에, 심장마비라니. 63세의 나이에 저술작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체격도 건장하게 보이고 아주 건강해 보이고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아 보이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심. 장. 이.  멎. 어.  버. 렸. 다!

내가 소설가라면 이 시점부터 소설 한 권이 쓰여졌을 정도로 감회가 컸다.
그저 심장이 멈췄을 뿐 아직 이승을 떠날 준비가 안 된 혼령이 떠돌며
이 기막히고 어처구니없이 급작스러운 이별을 한탄하고,
살아온 날과 살고 싶었던 것들을 불러내고, 애틋한 사람들에게 못 다 한 말을 하는 모습에서 
인생이 무엇인지가 집힐 것 같다.

그저 책 두 어 권 읽었을 뿐인 독자의 심정이 이럴 때, 그가 그토록 사랑한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는 소문난 가족주의자였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성장환경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0대의 어린 나이에 가정교사를 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혼자 삶을 헤쳐 왔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의 집에 갔더니, 친구가 달라는 대로 아버지가 돈을 주더란다.
'아버지란 존재는 화수분 같았다'며 그는 감탄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한없이 낯설었기에 더욱 동경의 대상이었을 아버지,
그는 자신이 갖고 싶었던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었을까.

연애하던 때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아마 '학원'지의 기자 시절에 만난 것으로 기억하는데, 두 사람은 성장환경이 너무나 달랐다고 한다.
경제관념없이  살던 이윤기님을 조련시키려는 그녀의 의지가 '집요했다'던 부분에서
또 한 편의 드라마가 그려진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남매를 낳았고,
이윤기님은 아이들이 배울까봐 교통신호 한 번을 어기지 않았다고 한다.

스스로 팔불출이라며 대놓고 아이들자랑을 하던 이윤기님,
자기네 가족은 들어오고 나갈 때 반드시 허깅으로 한다던 그,
나는 그에게서 내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던 아버지상을 보고 있었나 보다.

아버지를 전혀 겪어보지 않고 컸어도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모습에
한 가닥 위안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애들 아빠와 한참 갈등이 심할 때, 내 얘기를 듣던 지인이 대뜸
'니 신랑은 아버지를 겪지 못하고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애들 아빠가 성장한 뒤인 열 일곱 살 때  돌아가셨지만, 그 전에도 시아버님은 역할모델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솜씨는 좋았지만 주사가 심해서 술만 마시면 온 가족을 못살게 굴어 '개목수'라는 별명을 가졌다는 분.
지인의 말을 들으며, 그렇다면 내 아이들도  아버지를 제대로 겪어보지 않은 게 되는구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아이들 성장기에는,
지하철에서 다정해 보이는 부녀만 보아도 눈물이 나왔다.
내가 아버지의 사람을 흠뻑 받으며 자랐기에 이런 기분이 더한지도 몰랐다.
이런 나에게 이윤기님은 충분히 위안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맞아!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모든 것을 줄 수는 없는 거야.
아버지가 주지 못한 것을 이런 사회적인 아버지들이 채워 주겠지'

가깝든 멀든 신뢰하던 인물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준다.

63세에서 내 나이를 빼 보는 아침, 조금은 숙연해진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너무 보잘 것 없어서 한숨이 나오는 내 삶에 박차를 가해야 하리라.

25일에 심장에 이상이 발생하여 27일에 별세하셨으니,
이틀간 의식이 있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라도 할 수 있었기를 빈다.

그의 혼령이 아직 떠돌고 있다면 이 글도 보아 주시기를,
자신의 삶이 여러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 한 가닥 의미가 된 것을 알아 주시기를,
부디 편안한 곳으로 가시기를 빈다.

Posted by 미탄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허영만 화백이
    "우리는 서로 팬이었다"며 추모한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이것은 내가 지향하는 최고의 인간관계이다.

    2010.08.28 11:5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푸른 퀴리

    정말 심장이 멎어버렸엇어요.
    어제 내가 무얼 잘.못.보.았.나?. 했더랬어요.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요...

    2010.08.28 14:29 [ ADDR : EDIT/ DEL : REPLY ]
    • 푸른 퀴리님도 이윤기선생님을 많이 미더워하셨나보네요.
      하긴 그 우직해 보이면서도 지적인 느낌과
      신화에 대한 연구성과며 많은 분들이 그러셨을 것 같아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0.08.28 15:32 신고 [ ADDR : EDIT/ DEL ]
  3. 사과상상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신화에 대한 호기심을 만들어 주신데에 더불어
    따뜻하셨던 분으로 기억에 남겨질 것 같아요.

    2010.08.30 15:07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럼요, 글로만 접해도 다 느껴지지요.
      시오노 나나미가 게리 쿠퍼가 죽었을 때 상중이라고
      학교에도 안 갔다는 얘기가 생각날 정도로,
      조금만 부지런하다면 가족에게 한 마디 위로라도 건네고 싶은 심정이었답니다.

      2010.08.30 18:13 신고 [ ADDR : EDIT/ DEL ]
    • 사과상상님께

      누구나 선과 악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가끔씩 제게서 그런 요소를 보게 되는데 다른 분을 악하다고 말한 적이 있으나 고쳐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분이 변화했을 거라 변화해 갈거라 생각하고요. 다른 분들도 과거에 선의 행동을 인정해주시는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이렇게 기억하는 이윤기님은 미탄님이 소개해주셨듯이 선의 의지의 발현된 양태를 많이 갖고 계셨던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능력이 뛰어나신 만큼 타인에게 앎을 전달해주신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런 분이 계시면 좋은 것 같아요. 배우고 닮아가도록 노력할 수 있으니까요.

      2010.08.30 21:21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