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시장에 단골 정육점이 있다. 처음에는 그 중 큰 곳이라 무심히 들어섰는데 볼수록 예사롭지가 않았다. 우선 일하는 사람들이 전부 남자이다. 칼질하는 사람이 두 사람, 계란을 파는 젊은이가 한 사람, 그리고 어쩌다 보이는 나이 지긋한 사람이 그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정육점에 대한 내 이미지를 깨트리는 것이었다. 보통 정육점이라는 곳이 편안한 체격과 붙임성 좋은 중년부인네가 점령하고 있는 곳이 아니었든가. 그런데 하나같이 우람한 체격을 가진 남자 넷이 일하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낯설었다.


바로 이런 것들이다.  청장년 서 너 명이 입을 모아 "어서 오세요!" 소리치는 것은 인사라기 보다는 구령에 가까웠다. 달랑 인사만 던지고는 보통 소매점에서 있을 법한 담소로 이어나가지 않고 침묵 속에 고기만 써는 두 남자의 모습이 경건하기 짝이 없다. 고기를 다루는 직업이 이렇게 전문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동작은 자신감있고 거침이 없다. 게다가 두 남자의 팔 근육이 장난이 아니다.  조명도 붉고 진열장 속의 고기도 붉은 장면 속에서 힘줄이 툭툭 불거진 두 팔이 고기를 써는 모습은 충분히 그로테스크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섹시했다.^^ 머리에 무스를 발라 치켜세운 젊은 쪽보다, 40대 중반의 살짝 우울해 보이는 사람에게 마음이 갔다.


근처의 수퍼마켓보다 값이 싼데도 육질이 좋은 편이라 나는 당연히 그 정육점의 단골이 되었다.  드나든지 1년이 되어오지만 “전지 한 근 주세요!” 하는 식의 말 밖에 나눈 적이 없다. 그런데 며칠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전지 한 근 주세요!” 했겠다, 언제나 정성스레 무스를 바르는 남자가 물어 왔다.

“어떻게 드실 건데요?”

“고추장 양념이요.”

대답하는 순간, 등을 돌리고 일하고 있던 다른 한 사람이 몸을 돌려 나를 쳐다 보았다. 2초 쯤 우리의 시선이 부딪쳤다. 찌리릿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런! 그도 나를, 내 목소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뿐, 전지 한 근을 사들고 돌아섰지만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 나를 ‘개별적으로’ 바라봐 준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어떤 사람에게 온전하게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한 번 곰곰이 떠올려보라. 그 중 소중한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조차 그들에게 백프로 집중하고 있는지를. 나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때, 머리 속으로 이런저런 삶의 현안에 대해 궁리하곤 했다. 친정어머니의 치아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갈수록 내가 엄마의 말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서글퍼지곤 했다. 그런데 단 2초에 불과했지만, 정육점 남자의 ‘시선’은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 주었다는 것이 짜릿하도록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김찬호의 ‘생애의 발견’에서 본 한 장면이 떠오른다. 박재동화백의 제자가 TV에 나와서 한 말이라고 한다. 고교시절, 그는 소문난 문제아였다. 그 날도 친구 한 명과 같이 교무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벌을 받고 있었단다. 오가는 선생님들이 머리를 쥐어박으며 ‘이 놈들, 또 왔느냐’며 핀잔을 줄 때, 박재동화백이 그들을 미술실로 데리고 갔다. ‘어이쿠! 선생님께서 제대로 혼내시려나 보다’ 하고 바짝 긴장하고 있을 때, 박화백은 그들을 앉혀 놓고 초상화를 한 장씩 그려주었다고 한다. 아무 말도 없이 긴 시간 자신들을 응시해 준 그 시선이 백 마디의 훈계보다 더 마음에 남았다고, 그는 말했다.


누군가를 온전히 바라본다는 것! 나는 정육점의 작은 사건에서 이것을 배웠다. 그가 누구이든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온 마음을 기울여 집중하기! 그것만이 내가 온전하게 살아있는 방법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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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근에 '글쓰기' 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이 있던 중에 미탄님의 글을 읽으니, 참 좋습니다. 그 찌릿 ~ 하는 순간이 저에게도 제 일인양 느껴졌어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신 문장을 하나하나 다시 보게 됩니다. 의식을 놓치지 않고 사물을 명징하게 바라보는 것.. 공지영이 말했던 글쓰기의 기본전제였는데요. 저는 연습을 참 많이 해야될것 같습니다.

    2010.01.24 12:00 [ ADDR : EDIT/ DEL : REPLY ]
    • 왜요, 젠느님에게서도 순간에서 의미를 잡아채는 '촉'이 느껴지던걸요.^^
      어느 날 초등 때 본 어머니의 모습, 그 장면에서 이끌어낸 의미와 다짐이 일품이었답니다.

      2010.01.24 23:08 신고 [ ADDR : EDIT/ DEL ]
  2. 블로그 잘 둘러보고갑니다.
    요즘 장난식으로 밤에 노트에 끄적이듯이 블로그에 글을 적어보고있는데
    이런글을 보니 저도 한번 나만이 아닌 읽는사람에게도 무엇을 전해줄 수 있는
    글다운 글을 적어볼까 하게하는 글이네요
    고마워요

    2011.12.07 02:4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제 글이 하늘님에게 다가갔다니 제가 더 고맙지요.^^
      무엇이든 쓰기 시작해 보세요.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후회하고 결단하는
      모든 것이 언어로 되어 있기에 막강한 변화를 가져온답니다.
      매일 조금씩 쓰기에는 블로그가 최고구요.

      2011.12.07 15:12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