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책2009. 11. 14. 08:50

김찬호, 생애의 발견, 인물과 사상사 2009


내가 자주 가는 수원 화성에는 한 쪽이 막힌 도로가 있다. 도로변에 접한 저 쪽 진입로에 길이 막혔다는 표지가 없어서 꽤 많은 차들이 들어왔다가 허탕을 친다. 가끔 길이 막힌 줄도 모르고  날렵하게 밀고 들어오는 차를 본다. 나는 그 차의 운전자에게 길이 막혔다는 말을 해 주지 않는다. 그리곤 곧바로 되짚어 나오는 차를 또 본다. 그럴 때  마치 그 길이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 막혀 있고, 때로 길이 아닐 수도 있는데 저마다 끝까지 가 보아야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살면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문제는 만천하에 모두 드러나 있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기출문제집’이라는 책도 있듯이 인생선배들의 경험담 속에, 그 많은 책들 속에 인생의 문제는 모두 드러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에 대해 탐구하지 않는다. 아니 탐구한다 해도 ‘아는 것’에 한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저마다 가장 어려운 방법으로 인생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결혼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결혼을 했으며, 엄마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엄마가 되었다. 불같은 열정으로 천하를 주유한^^ 20대, 가족을 만들고 세운 30대, 재도전과 비약에 대한 욕구로 자칫 위험했던 40대를 지나 지금 여기에 서 있다. 그리고 천만다행하게도 나는 지혜 하나를 갖게 되었다. 길이라고 생겼으면 무조건 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막힌 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게 된 것이다.


시행착오도 나쁘지는 않았다. 실수조차 없었다면 내 삶은 텅 비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고 간다면 더 멀리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마간산 식으로 겉핥기 하는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현지인의 문화에 혀를 대보는 맛있는 배낭여행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가 만일 삶에 대해 진지한 탐구를 하고 싶다면 여기 너무나 적절한 지침서가 있다.


김찬호의 ‘생애의 발견’은 한국인의 사회적 초상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유년부터 노년까지 모든 연배에 걸쳐 한국인의 사회학적, 생애사적인 의미를 새겨 놓았다.  책 한 권에 전 연령대를 다루다 보니 한 세대에 할애한 분량은 길지 않다. 가령 ‘결혼’에 대한 분량은 17쪽에 불과하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자료를 섭렵했는지 촌철살인 격의 유머와 인용이 감탄스러울 정도이다. 몇 가지를 옮겨 보자면,


“저와 잠깐 결혼해 주시겠어요?”


결혼 지속기간이 점점 짧아지는 프랑스에서 청혼할 때 그렇게 능청을 떠는 이들이 있단다. 이 짧은 말에 결혼제도의 변화에 대한 만감이 스쳐 간다. 이런 조크도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두 번째 남편은 고고학자였다. 누군가 그녀에게 고고학자 남편을 둔 것에 좋은 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 왈,

“물론 있지요. 내가 나이가 들수록 남편이 나에 대해 점점 관심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조크 하나 더. 날마다 투닥투닥 싸우며 사는 부부가 있었다. 어느날 부인이 남편의 수첩 속에서 자신의 사진을 보고는 적잖이 놀라서 조용히 물어 보았다. 왜 자기 사진을 가지고 다니느냐고 하자 남편은  힘들 때마다 살짝 꺼내서 본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아내는 가슴이 뭉클했다. 원수처럼 지내지만 그 사람 참 속 깊은 데가 있구나. 그리곤 ‘그래 힘들 때마다 내 사진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남편의 대답인즉,

“당신의 사진을 보면서 세상에 이 보다 더 힘든 일이 있을까 라고 생각하지”


이 책에는 마치 ‘허무개그’ 같은 이런 조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읽는 것만으로도 더불어 산다는 것의 소중함에 마음이 짠해진다. 부부가 어떤 심정으로 살아야 한 지 울림이 크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싸움에 지친 어느 부부가 각자의 감정을 암호로 표시하여 싸움을 예방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군인인 남편은 퇴근할 때 모자를 비뚤게 쓰는 정도로, 그를 맞이하는 아내는 머리를 꼭 동여매는 정도로 기분의 저조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기분이 괜찮은 쪽이 좋지 않은 쪽을 배려해 준다는 원칙을 세웠다.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싸움이 줄어들었다. 서로의 기분을 섬세하게 살피게 될 뿐 아니라 배우자를 마주하기 전에 자신의 기분을 돌아보면서 ‘정말로 내 기분이 그렇게 나쁜가?’라고 자문하게 되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확실하게 표현하면서 기쁨을 증폭시킬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모자를 아주 비뚤게 쓰고 퇴근했다. 공교롭게도 아내 역시 어떤 일로 기분이 몹시 나빴던지 머리를 질끈 묶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마주친 부부는 처음에는 매우 당황하여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곧 와락 달려들어 포옹했다고 한다.


그는 수많은 유머와 일화를 동원해서 우리네 결혼생활의 허와 실을 짚어준다. 일본에 새로 등장했다는  卒婚도 등장한다. 卒婚! 결혼을 졸업했다는 뜻으로, 법적인 부부관계는 유지하되 양자 합의 하에 완전히 독립된 생활을 하는 것이란다. 수명연장시대에 부응하는 결혼제도의 진화인 셈이다. 그러나 이 많은 냉소와 실험적인 형태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결론은 분명하다. 어떤 결혼이라도 부부에게는  ‘낭만적 열정이 자연스럽게 식어가는 과정에서 그 공백을 새로운 의미와 재미로 채워가는 능력’이 관건이라고 한다. 


30년 내에 일부일처제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자크 아탈리>, 저자는 가족의 의미를 분명하게 짚어줌으로써 실제적인 위안과 힘을 준다. 핵가족은 상호인정에 기반한 소통의 잠재력이 자라나는 곳이요, 일상생활의 민주화를 구현하는 장소로서, 사회 모든 영역에서 소통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감성지수나 사회적 지능이 강조되고 있는 이 때, 가족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도 유능한 사람이 되는 시대라고 분명하게 못박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연령대가 가진 의미를 짚어주니, 살아가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 같다. 인생을 전체로서 볼 수 있는 혜안을 주며, 지금 내가 통과하고 있는 지점에서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문체가 전혀 딱딱하지 않은 데다가 예화가 워낙 풍부해서 재미있기까지 하다. 나는 아이들을 다 키웠는데도 유년에 대한 부분을 빨려 들어가서 읽었을 정도이다.


20대 취업난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과 삶의 고비용구조를 조정해야 한다는 탄식, 생애의 속살을 엿보는 30대에 전력질주해야만 하는 이유... 이 책을 읽고 시야가 한층 넓어진 것 같다. 책 한 권이 줄 수 있는 것이 이렇게 큰 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글쓰기에 대한 자세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우선 그 광활한 참고자료에 대해 머리를 조아린다. 마음에 와 닿은 예화 하나를 더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많은 부모와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의미있는 타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거론된 예화이다. 


박재동화백이 한때 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을 때의 일이다. 제자가 TV에서 소개했다고.

그는 문제아로 걸핏하면 교무실에 끌려가, 그날도 교무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들고 있엇다. 지나가던 몇몇 선생님들이 “이 녀석들, 또 걸렸구나” 한 대씩 쥐어박을 때 박선생은 둘을 미술실로 데려갔다. 이제 작정을 하고 혼내시려나 보다 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었는데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둘을 의자에 앉히더니 정성들여 각각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그 그림을 한 장씩 손에 쥐어 주면서 돌아 가라고 한 것이다.  긴 시간을 내어 온전히 응시해 준 눈길, 자신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 준 손길이 백 마디 훈계보다 훨씬 값지고 힘이 있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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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책의 소개에 적당한 서두가 떠올라서 리뷰를 한 편 더 써보았슴다.
    중간의 인용부분은 같지만 훨씬 틀잡힌 글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
    좋은 책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꾸 소개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입소문의 기본요건이겠지요.

    2009.11.14 08:5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마지막 예화가 참 가슴에 와 닿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09.11.15 14:48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정말 이 책을 읽으며 인용의 힘에 대해 진하게
      배운 느낌이 들어요.
      박재동화백 예화도 그렇고 부부가 서로에 대해 연민을
      갖는 예화도 그렇고, 복잡하고 어렵고 길게 글쓸 이유가 없더라구요.^^

      2009.11.15 21:36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