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만나면 6명이 함께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제각기 내가 생각하는 나, 상대가 생각하는 나, 그리고 진짜 내가 있어서 그리 된다는 해석이다. 처음 이런 관점에 접했을 때 의문이 생겼다. ‘진짜 나’라는 것이 분명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 꺼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에베레스트 산과는 다를 것 같다. 어디엔가 확고부동하게 존재하고 있어 기를 쓰고 올라가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아는 이미지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놓은 이미지.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많이 둘 지는 각자의 몫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만을 나라고 생각하면, 독자성은 있겠지만 자칫 독불장군이 되기 쉬울 것이다. 남들이 생각하는 나를 많이 수용한다면 사회성은 좋을지 몰라도, 수시로 나를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이 비율을 정하는 데에도 ‘나’가 작용하는 것이니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봐야 할까? 그 얘기는 살짝 넘어가자. 어려운 얘기는 딱 질색이거니와 때로 실체보다 이미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만나면 적어도 4명이 함께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가 생각하는 나.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러니 ‘나’는 꼼짝없이 상대의 시선 안에 갇히고 만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상대는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판단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한 명이 아니라,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수만큼 복제된다.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중에는 도저히 같은 사람에 대한 인상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다른 이미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모두 받아들여 나를 구성한다면, 나는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를 ‘나’라고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지극히 변덕맞고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도 내 곁을 떠날 수 있지만, 나는 살아있는 한 나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내 생각을 제일 귀하게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내 안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면 확신할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수용한다고 해도 힘을 갖지 못한다. 꾸준히 나다움을 추구할 때 다른 사람들도 나에 대한 생각을 수정할 것이다. 내 생각을 가장 중심에 놓고,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반사되어 오는 이미지를 추가한 것이 ‘나’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의 타고난 성격이 고정불변이라는 생각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뇌의 신경세포는 거의 평생 동안 새로 생겨난다고 한다. 그 결과 성격도 언제고 변할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원래 있는 자아를 발견하거나 실현하려는 일이 상대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된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이 될 지 각자 자유롭게 정해야 한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 가 아니라, “나는 누가 될 수 있는가”이다.


내게는 ‘나는 누구인가’보다 ‘나는 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더 흥미진진하다. 나를 찾아서 무엇에 쓸 것인가?  어차피 무언가에 쓰기 위해 나를 찾는 것일 테니,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를 관찰하고 나와 소통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는 누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내가 원하는 내가 될 수 있는가’에 더 집중한다. 그 대답은 ‘긍정적인 자아상’이다.


전에는 생후 3년 이내에 성격의 대부분이 형성된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생후 첫 인간관계인 부모 특히 엄마의 역할에 초점이 맞춰지곤 했다.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인정을 베푼 부모를 가진 사람은 행운아이다. 그 때 형성된 긍정적인 자아상이 평생 간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30년 이상 살아온 사람이 아직도 부모 탓을 한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닐까. 이제는 부모에게서 받고 싶었던 것을 내가 나에게 주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바라지 말고 스스로 주어라. 어떤 소중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나를 보살펴라.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어라. 심지어 그것을 이루었다고 가정하고 그 장면으로 들어가 오감을 열어놓고 생생하게 즐겨라. 뇌는 상상과 실제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실제처럼 생생한 이미지 속에서 내가 원하던 것을 향유하는 만족감이 자신감을 갖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속적으로 생성해낼 것인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나는 내가 생각한 범위 이상으로 나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좋은 친구나 연인, 스승이 내 안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보고 추임새를 넣어준다 해도, 내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가능성에서 그치고 말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된다’는 말은 사실이다.


** 빨간 글씨는 베르너 지퍼, 크리스티안 베버 지음,'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 에서 인용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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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각기 다른 '나'로 인해 각각의 단계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듯 합니다.
    '차이'를 줄여나가기 위한 코드화가 가끔은 '나'를 새장안에 가두는 것은 아닌가 하는 탓에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자조적 반성을 하기도 합니다. ^^;;

    오랜만에 들렀습니다. 맛있는 식사는 여전하신지요....^^:;

    2009.07.20 16:04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익숙한 인사말이 반갑네요~~
      각각의 단계마다 극심한 차이를 느낄 정도라면,
      그만큼 많은 가능성과 열정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되겠지요.
      살아보니 말임다.^^
      변신능력이 필수적일 정도로 인생이 길어요.
      자조적 반성 같은 것 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맘껏 변신하라고 권하고 싶은데요.
      거기에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요.

      2009.07.21 09:48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