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 비오는 소리에 두어 번 눈이 떠졌다. 양동이로 들어붓는 듯한 강우량에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빗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산책에 나섰다. 익숙한 산책길이 흠뻑 젖어 평소와 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비에 젖어 더욱 울창해 보이는 숲과 검은 나무둥치들이 밀림을 연상시켰다. 화성열차가 다니는 넓은 도로에 빗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경사진 도로를 달려가는 빗물이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냈다. 산수화에서 산이 겹쳐 선 모습 같기도 하고, 지도의 등고선 같기도 한 포물선은 아름다웠다.


큰 길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시냇물이 지천이었다. 조촐한 계곡마다 하얀 시냇물이  포말을 일으키며 힘차게 흐르고 있었고, 돌담 틈에서도 샘물이 솟듯 물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땅 속에 쥐구멍처럼 뚫린 곳에서는 동그랗게 수막을 형성하며 물이 흘러넘치고, 즐겨 다니던 계단 위로는 다단계^^ 폭포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시냇물 구경을 하며 걸었다. 저마다 모양도 달랐지만 특히 물소리가 매혹적이었다. 물의 양과 장애물, 그리고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소리가 모두 달랐다.  상큼하고 영롱한 물소리를 들으며 한참동안 서 있었다. 아무리 들어도 도저히 글로 옮겨 적을 수 없는 것이 신기했다. 물소리는 들리는 순간 사라졌다. 아주 로맨틱한 순간에 잠에서 깨어난 꿈같았다.


코너를 도니 신천지가 열렸다.  잠자리. 어디서 왔는지 수십 마리의 잠자리가 비행쇼를 벌이고 있었다.  높은 곳에는 바람이 세게 부는지 커다란 나무 꼭대기가  크게 일렁이자 먹구름이 빠르게 흩어졌다. 산비둘기 몇 마리가 날아가다 말고 바람에 떠밀려 갔다. 잉잉, 쏴아, 후드득...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 순간 나는 음악을 들은 것 같았다.  아니 음악을 느꼈다. 감각이 발달한 청각장애자가 음악을 느끼는 기분이 딱 이럴 것 같았다.


아, 인생은 아름다워. 마음이 무언가로 가득 차 오르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넓은 집, 해외여행, 고급와인이 없어도 지금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것들이 다 충족된다 해도 지금 누리고 있는 충만감이 없이는 말짱 도루묵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 순간을 음미하며 한참동안 그 자리에 못박혀 서 있었다. ‘신화의 힘’의 한 구절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은 슬픈 것입니다.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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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른 퀴리

    엊그제 사촌동생이 이쁜딸을 낳았답니다.
    그 유명세 탔던 메즈메디 병원에서요.
    제가 있는곳에서 멀리 있어,호우주의보 무서워<?> 아기얼굴을 아직 못보았어요.
    한데도 새로운 생명의 탄생, 경이로움, 신비에 감사한 마음이 차올라있답니다..

    그래요,
    이대로도 참, 굉장한 인생이예요!
    재미가 없었거든요,
    세속성이 개입되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라구요.......?......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러니까 저는, 삶은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본다는 말씀에 한표 손 올립니다!!!!

    장마가 그치면 햇살이 더 눈부시고, 고맙고 반갑겠지요.
    감사합니다! 좋은 글, 좋은 말, 속삭여주셔서요!!!!!!

    2009.07.14 20:25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지금도 딸애가 공연히 인상쓰며 자전거를 갖고
      나가네요.
      한 마디 할까 하다가 내버려 두었네요.
      웃으면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면서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아니까요.
      그러면서도 안타깝기도 해요.
      어찌 보면 단순하달 수도 있는 인생의 문제를
      저마다 제일 어려운 방법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삶인가 싶어서요.

      2009.07.15 08:52 [ ADDR : EDIT/ DEL ]
  2. 뷰티오키드

    안녕하세요? 미탄님! 절 기억하실런지요. 정경연에서 잠깐(^^) 뵈었던 적이 있었죠.
    한결같이 안정적으로 정경연 활동(?)을 하시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온라인에서의 관계라는 게 일방적일 수 있기 땜에 상처도 쉽게 받을 수 있지만 사실 편리한 측면도 있어서, 저 역시 제 상황에서 이기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보니 힘들 때 위로해주고 공감해줬던 고마운 인연들도 쉽게 흘려보냅니다.ㅠㅠ

    저 셀프리더쉽 5기 수업을 받고 있어요.
    이미 미탄님과의 진짜^^ 인연이 시작된거죠 ㅎㅎ
    조만간 뵐 날이 올 거라는 기대감 품고 있을 께요.

    윗글은 요즘의 제 감정모드와도 맞닿아 있어서 편안하게 읽히네요.
    제가 요즘 `평범`에 필꽂혀 좀 편안하답니당~~

    2009.07.18 09:58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아, 안녕하세요? 뷰티오키드님.
      그럼요. 기억하고 있지요.
      제 시놀이에 아주 인상적인 댓글을 달아주셨잖아요.
      00탄! ^^ 천진난만하고 기발한 연상작용으로 보아 아주 창의적인 분 같아요.
      5기 프로그램에 오셨군요. 조만간 뵙게 되겠네요.
      프로그램 재미있지요?
      저도 워낙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심층적인 대화를 선호하는 편이라 아주 재미있게 참여했던 기억이에요.
      충실하고 의미있는시간 되기 바라구요,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고마워요.
      블로그 하고 계시면 주소 알려 주세요~~

      2009.07.18 12:55 [ ADDR : EDIT/ DEL ]
  3. 뷰티오키드

    아쉽게도 저는 블로그가 없답니다.
    근데 별로 욕구도 느끼고 있지 않다고나 할까요^^
    인터넷에 오래 머물러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그냥 멍~때리고 있는 시간이 많답니당^^

    날씨가 게이기 시작하네요.
    아들데리고 개 산책이라도 한바퀴 돌고 와야 겠어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2009.07.19 12:10 [ ADDR : EDIT/ DEL : REPLY ]
    • 멍~~ 때리고 있는 시간이 창조성의 원천이겠지요.
      근데 나역시 한 멍~~ 하는 사람으로서,
      지금 생각하면 서운할 때가 많네요.
      오랜 잠복기를 거쳐 프로그램에 오신 것만 보아도,
      뷰티오키드님에게서 소통과 발산의 의지가 느껴지는걸요.
      천천히 자신을 풀어내 보시기 바래요~~

      2009.07.19 13:06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