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새알심2009. 4. 2. 11:24

문제의 발단은 고양이였다. 딸애는 전부터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했다. 우리는 고양이를 키우기로 거의 확정짓고 구체적인 부분을 의논하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고양이가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자고 했다. 사는 곳이 1층이라 가능한 일이었고, 나는 고양이에게도 가능한 한도 내에서 자유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딸의 생각은 달랐다. 고양이가 밖을 드나들면 지저분해지니 출입을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그럼 고양이는 평생 바깥구경을 하지 못하는 거네”

천상 낭만적인 자유주의자인 내가 말했다.

“그래야 깨끗하게 키우지. 껴안고 잘 수도 있고”

“아무리 미물이라도 어떻게 한 번도 바깥 공기를 못 쐬며 살라고 할 수가 있어,

그럼 내가 놓아주어야지”

“그럼 난 엄마를 놓아 줄 거야”


허걱~~ , 엄마를 놓아주겠다는 딸의 말에 나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불쑥 나온 말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불쑥’이란 없다. 한 번은 생각했던 것이 무의식에 들어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것일 게다.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 딸의 자존감은 급상승되었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딸은 혼자 외발자전거를 사서 연습하기도 했고, MTB에 입문하면서 동호회 멤버들에게서 잘 탄다는 칭찬도 많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여자 선수층이 얇아 조금만 연습하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한 모양이다. 아이는 여행이나 레저스포츠에 대한 비전을 가지며 행복해했고, 그 분야에 대한 책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딸은 매사에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수가 많아졌다. 성장기에 나에게서 받은 설움을 톡톡히 되돌려줄 모양이다.^^ 초보엄마시절 나는 딸의 장점을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바란 것은 간단했다. 책을 좋아하고 어떤 분야에라도 집중력을 보여주기를 원했을 뿐이다. 감정이 풍부한 나는 아주 작은 일에도 감탄하고, 아주 미흡한 일에도 낙심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오빠에게 건네지는 찬탄을 딸은 차별대우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자신에게 건네지는 서운함을 상처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내가 아이들의 판단과 추인을 받아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컴퓨터 활용능력은 물론 일상의 여러 가지 장면에서 아이들의 감각이 나보다 낫다. 물론 자신의 세계를 갖고 성장해나가는 아이들이 대견하다. 나보다 현실감각이 훨씬 뛰어난 아이들을 보며 본격적인 인생후반전의 구상을 해 보기도 했다. 엄마로서의 숙제를 어지간히 했으니 이제 그야말로 자유인으로 돌아가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고, 무슨 일이라도 해 보리라 투지에 불타기도 했다. 그래도 이번 같은 장면에 부딪치면 가슴이 철렁하다.


이다음에 자기 집을 어떻게 꾸미고 싶다는 구상을 내 놓는걸 보면, 아마 딸은 독립감에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자기 스타일을 찾았다는 행복감이 날로 자신감을 더 해주고 있을 것이다. 어려서는 대단해 보였던 엄마라는 존재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어 내심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나다. 아이들의 세계가 계속 넓어지는 것만큼 내 세계를 확장시키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해서 아이들이 물어다주는 정보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점점 축소되고, 나의 의견과 판단은 점점 비중이 약해질 것이다. 행동반경은 줄어드는데 소통에 대한 욕구는 더 커질 경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맙소사! 내가 아무도 듣지 않는 쓸 데 없는 소리를 하고 또 하는 처지가 되다니! 장면 하나에서 파급된 생각은 일파만파로 번져 갔다. 다른 요인과 합쳐져 다운되기 시작한 기분은 당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머릿속이 하얗게 증발되면서 단어 하나, 느낌 하나가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 아무런 감흥이 없다. 아침에 서둘러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어, 천 길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기분이다.


혹독한 슬럼프에서 나는 겨우 깨닫는다. 이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자신없어 하거나 자기연민에 힘들어 하고 있었구나.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인 내가 과잉낙관주의의 환상에 빠져 있을 때, 오히려 그들은 참혹하나마 현실에 발 붙이고 있었던 거구나.


그렇다면 이런 인식은 내게 약이 될까, 독이 될까. 약간의 환상이 가미된 단단한 자기확신과  지극히 현실적인 평범한 자기인식 중 어느 것이 더 좋을까.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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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댓글입니다

    2009.04.02 21:09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자신의 재능을 믿어도 좋아요.
      내가 보는 눈이 좀 있다우~~
      진솔한 마음, 고마워요.

      2009.04.04 10:55 [ ADDR : EDIT/ DEL ]
  2.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게씁니다.
    올해의 숙제인 자기인식 자아발견을 아직 못했으니..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되어 토댁이 무척 좋아요.
    담주 경주로 공부하러갑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을 해야하지요.

    쩡으니는 유치원에서 "울 엄마 공부하러가요"를 자랑삼아 하고 다닌다는군요..ㅎㅎ
    공부가 좋은 것인 줄은 벌써 아나 봐요^^

    2009.04.03 13:5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토댁님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거에요.
      정말 언제봐도 대단한 에너지네요.^^

      2009.04.04 10:57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