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새알심2008. 10. 22. 21:37


평소처럼 6시 반 경에 눈을 떠서 쓰던 원고를 하나 고쳤다.  그런대로 마음에 들어서인지 기분이 좋았다. 순식간에 오늘 할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아주 천천히 걸어서 산책을 하고, 도서관에 갔다가 내가 좋아하는 제과점에서 샌드위치를 먹을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오늘 걸음걸이를 포스팅하리라, 제목은 '찰나에 비석을 세우다'  ㅎㅎ

산책은 아주 좋았다. 가을의 트레이드마크인 억새밭과 빨갛게 물든 담쟁이와 도로에 깔린 낙엽과 무엇보다도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는 선선한 날씨가 일품이었다.


핏빛으로 검붉게 물들고 있는 담쟁이들 사이에서 천연덕스럽게 새파란 색을 뽐내는 담쟁이가 꼭 철들지 않는 나 같았다. 요즘은 거울을 볼 때마다 한심하다. 나이을 잊어버리고 살다가도 거울만 보면 충격을 받는다.  단식을 해서 오킬로그램 쯤 빼고 화장술을 새로 배운다해도 이 고개를 넘어갈 일이 아득하다. ^^ 


 



촉촉하면서도 청량한 기운이 폐부를 파고 들었고,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이 너울대며 떨어졌다. 조촐한 단풍들과 눈맞추며 한없이 걸어도 좋을 것 같았지만, 시간이 아까워서 서둘러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도서관에 들어가면, 인류의 정신적 유산에 접속하는 기쁨에 전율을 느껴야 한다고 한 사람이 진중권이었든가.  그 정도는 아니라도 나는 도서관이 참 좋다.  서가 어딘가에 나와 궁합이 맞는 책이 숨어있어 내가 발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필받을 수 있는 책을 만나면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자의 내공을 수혈받아 정신적인 키가 성큼 커지는 기분이다. 별로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정서적인 안정감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책 덕분이다.

도서관이 가까운 곳에 살면서 책에 대한 소유욕도 없어졌다. 아무리 책이 많기로 도서관보다 많을소냐. 굳이 소유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만큼 또 가벼워졌다.

세 시간 정도 맛있게 책을 보았다. 거기까지는 아주 좋았다. 그런데 빵집으로 가는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기분이 다운되기 시작했다. 가랑비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엄습하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하고 공허한 느낌에 또 사로잡힌 것이다. 불가능과 부정과 의심과 의구심이 집결하여 나를 쪼아대는 시간!

남들의 사소한 몸짓을 가지고 스토리텔링을 하는 습관도 싫고, 궁핍한 조건에 갇혀 있는 것도 너무 한심하다. 니가 나이가 몇인데 겨우 빵집에서 안분낙도를 찾는거냐. ㅠ.ㅜ


이 빵집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곳이다. 이사한 다음날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장인정신이 느껴졌다. 작은 규모인데도 빵 만드는 사람이 대여섯, 서빙하는 사람이 대여섯 명이 있다. 주방을 오픈해서 훤히 보인다. 이 집 빵을 먹고 나서야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 맛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았다. 빵을 직접 만드는 곳과 냉동빵의 차이를 알게 된 것이다. 산책과 도서관 뒤에 이어지는 마무리코스인데 오늘은 빵을 타이어 씹듯이 먹어야 했다. 이전에 찍은 사진 한 장.

결국 집에 와서 늘어지게 한 숨 잤다. 자면서 생각했다. 이런 식의 감정기복을 몇십 년동안 겪을 수는 없다. 더이상 이 불청객에게 놀아나며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해답은 곧바로 주어졌다. 저녁에 읽기 시작한 '60초 소설'에서 암시를 받은 것이다.  저자는 변호사 협회 기자생활을 하던 중 지루하고 상투적인 업무에서 탈출하고자 '60초 소설'의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60초 소설'은  대성공이었지만 7년간 종사하다 보니, 또 다시 얄팍하고 통속적인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것을 발견하고 자문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뉴욕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60초 소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아이오와 주의 광활한 옥수수밭과 사막을 찾아, 소몰이꾼과 양치기 목동과 왕새우잡이 어부를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아!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험을 한 지 너무 오래 되었다.

오늘의 결론이다.
너무 오래 일을 벌리지 않고 웅크리고 살았다.
프로펠러처럼 활기차게, 악어처럼 탐욕스럽게 삶을 추구하는 것만이 저 음흉스러운 공허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대학졸업도 하기 전에 농촌으로 살러 갔던 20대처럼, 맨 손으로 건물을 지었던 40대처럼 다시 한 번 겁이 없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아직은 모호하지만, 계속해서 공허와 결핍에 시달리지는 않으리라는 결심을 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갔다. ^^


Posted by 미탄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생각만큼만 가볍게 톡톡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
    하루에 대한 생각의 무게는 나이와 상관이 없나 봅니다.

    저 빵집은 언젠가 선생님의 포스팅에 등장했던 그 빵집이 맞지요?
    사진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 빵집. ㅎㅎㅎ 저는 이 빵집을 그렇게 기억해요.

    이 포스트에서 가을을 담아가요.
    아직 낙엽도 못 봤는데.
    오늘은 벌써 겨울이 되어버린 느낌이었거든요.

    2008.10.22 23:55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왜?
      "의식은 현실이다" 이런 말도 있는데?
      모든 것이 생각의 산물인 것이 나는 정말 믿어져.
      가벼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가벼워지고,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행복해 질 거야. ^^

      2008.10.23 07:12 [ ADDR : EDIT/ DEL ]
  2. 간혹 김포도서관에 가는데, 주변에 마땅한 산책로가 없어서 탐색 중입니다..^^
    강화에는 산책로가 너무 많구요.
    이제 슬슬 허투루 보내는 시간을 줄여볼 생각입니다.
    조금은 짜임새있게..^^

    2008.10.23 07:4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시간!
      요즘에는 그냥 앉아만 있어도 시간이 나를 스쳐 휙휙 지나가는 느낌이 들어요. ㅠ.ㅜ
      그렇다고 해서 조바심을 내면 금방 지치고 성과도 더 안 나와주니, 참 이 마음의 작용이란! ^^

      2008.10.23 10:29 신고 [ ADDR : EDIT/ DEL ]
  3. 제비꽃

    ㅎㅎ 재밌게 읽었어요.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같기도 하고, '생활의 발견' 같기도 하고..

    중간에 삽입된 '공허'에 대한 단상이 이 글에 힘을 실어 주네요.
    인생의 매 순간마다 행복만 있다면 날아가는 새의 발자국일지도 모르죠.
    쌤과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기쁨이 있으면 기쁨과 놀고, 공허가 있으면 공허와 놀고.

    이 공허란 놈의 장난 때문에 다시 질러보겠다는 결심도 주어진 것 같은데요.
    불청객에게도 긍정적 불씨를 발견하신, 미탄님께 응원 보냅니다.
    아자아자 홧팅! 그래, 가는거야!

    2008.10.23 09:07 [ ADDR : EDIT/ DEL : REPLY ]
    • 제비꽃님, 응원 고마워요.
      무언가 조금씩 야금야금 숨죽인 다람쥐의 발걸음처럼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은근히 지쳐서인가 이 징후를 나꿔챌 에너지가 조금 딸리네요. ㅠ.ㅜ

      2008.10.23 10:30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