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참 감정기복이 심합니다. 낮에는 눈부신 하늘을 보며 이 아름다운 세상을 완벽하게 향유하고 싶다는 열망에 달뜨고, 저녁에는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한숨을 내쉬는 식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선들거리는 바람을 느끼며 순간적으로 당황합니다. 그 뜨겁던 여름이 사라지고 서늘한 가을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여름이 사라진 것처럼 언젠가는 가을 또한 사라질 것이며, 곧이어 인생의 겨울이 닥치리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가을은 우리에게 생을 결산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과연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도달할 수 있는가?


전에는 내가 나의 존재를 규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놀고 혼자 일하고 혼자 걸어가는 데 하등의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서서히 사람에게 눈뜨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만 몰랐던거죠. 사람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한 인간은 없습니다. 나의 존재는 주변 사람들의 정서적 지지와 추인 속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 후에 인정받는 것은 천재에게나 해당되는 일입니다.


전에는 무슨 일을 시도할 때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을 따라 그저 내지르면 되었습니다. 이제 젊음의 뙤약볕이 사라진 오후를 맞이하여 텅 빈 손을 들여다보노라니, 와락 겁이 납니다. 내가 가진 자산이 별 것도 아닐뿐더러 세상이 공평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날아오르지 못하면 굴러 떨어진다!  현실적인 기반을 갖추지 못한 낭만과 즉흥적인 행동파의 현실인식은 그처럼 절박합니다.


잘 못 살았다! 옳든 그르든 내가 지니고 살아온 원칙을 수정해야 하는 것은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발판이 꺼져 땅 끝으로 추락하는 기분입니다. 내가 공중 분해되어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마치 이 곳이 아닌 다른 생이라도 있는 것처럼, 잠시 스쳐가는 여행자처럼 모든 것을 뜨악하고 낯설게 바라보는 방관자였습니다.  작은 이익에 목숨을 걸거나, 어딜 가나 무리를 이루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갖게 된 목표에도 죽기살기로 덤벼들지 못했습니다. 타고난 기질일 수도 있지만 은연 중에 세상을 만만하게 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완전히 바닥에 굴러 떨어진 자의 두려움을 갖고 다시 시작합니다. 난생처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나를 봅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차곡차곡 내 것을 쌓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살아가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기분입니다.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중년의 혼란이 저한테만 찾아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연의 계절 가을이 그렇듯이 인생의 가을 중년은 우리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하니까요.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고, 낯선 감정에 당황하면서 우리는 기존의 가치를 재배열하고 정신적으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알렌 B 치넨은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이라는 책을 쓰는 과정에서 각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평소와 같은 지적이고 객관적인 원고에 그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거리를 둔 것 같고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의아해하면서 원고를 고치고 또 고치던 그는 드디어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사적인 경험들, 감정들 그리고 생각이 빠져 있었던 거지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여성성을 드러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겁니다.


처음에 그 사실을 발견하고 알렌 B 치넨은 거의 공포를 느꼈다고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드러내는 감상적인 글쓰기를 혐오한 사람답게, 그동안 사적인 문제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객관적인 사실이나 임상 예에 숨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만 실컷 해 왔으니까요. 그는 내부의 욕구를 회피하려고 했지만, 마음 속의 귀찮은 목소리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책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다시 시작합니다. 의학적인 지식에 사적인 경험들을 더 해가면서 다시 책을 쓴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여성적인 측면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년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룹니다. 오래된 부부관계의 매너리즘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간 줄리엣은 세상을 섭렵한 후에 남편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다행히도 ‘뇌 용량이 콤팩트 통만한 ’ 여자들과 어울리던 남편도 다시 돌아옵니다. 이제 그들 부부는 서로에게 다시 호기심을 갖고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각자 자신만의 내적인 공간을 갖고 서로의 방을 방문하는 형식을 새롭게 배워 나갑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오류였던 셈입니다.


중년은 낡은 것을 뒤엎고 변혁에 몸을 맡기는 시기입니다.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노래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저 잔인한 계절 4월보다 더 역동적인 환골탈태의 시기입니다. 내가 협소한 자의식의 골방에서 나와 세상을 다시 배우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살짝 의기소침하고 쭈삣거려지던 마음이 위로를 받습니다. 훨씬 낮아지고 겸손해진 자세로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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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
    여행을 통해 즐겁고 행복한 맘만 만땅 충만 하시길 바래요.
    그 여행에 동참 하고 싶어 집니다.^^

    좋은 날되세요.

    2008.09.09 13:5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앞으로 한 10년쯤 있으면 토마토새댁님도 그 여행 떠나게 되실지도 몰라요. 그 때 제 블로그의 글들이 참고가 되도록 열심히 궁리하고 글 올릴게요. ^^

      2008.09.09 17:34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