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도미니크 보비, 잠수복과 나비, 동문선, 1997


불의의 사고로, 당신이 전신마비라는 불행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상황에 대처할 것인가. 여기 뇌졸중으로 전신마비에 처했으면서도,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새롭게 인간성의 경험을 확장시킨 사람이 있다.


장 도미니크 보비, 그는 잡지 ‘엘르’의 편집장으로 일하던 44세에 뇌졸중으로 꼼짝도 못하는 처지가 된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역시 ‘뇌간’이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 날 이후, 뇌와 말단 신경을 이어주는 통로인 ‘뇌간’이 고장남으로써 환자가 내부로부터 감금당한 상태, locked-in syndrome이 15개월간 지속된다. 오직 왼쪽 눈꺼풀의 감각만 남아있을뿐 TV조차 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그는 잠수복을 입은 것처럼 갇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운이 좋아서 조금이라도 잠수복이 헐겁게 여겨지면, 그의 정신은 나비처럼 자유롭게 유영한다.


책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답게, 쉽게 들뜨는 상상력을 타고난 사람답게, 그는 감각을 차곡차곡 저장해 두었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 음식을 조리하고 맛볼 수 있다. 기억이야말로 감각의 무궁무진한 보고이다. 계절의 변화를 철저하게 고려하여 가장 좋은 재료를 엄선하여, 품질보증서가 붙은 포도주를 곁들여, 기억 속의 성찬을 즐기는 그. 초기에는 결핍감 때문에 폭식을 했지만, 이제는 농가에서 직접 만든 소시지 한 줄로 만족한다는 그. 8개월간 먹은 것이라고는 레몬을 탄 물 몇 방울과 요구르트 반 숟가락이 전부일뿐, 필요한 열량은 위를 통해 직접 투여되는 처지의 그가 발굴해낸 놀이여.


TV를 켜는 것은 고도의 전략 문제라고 한다. 까딱하면 서너 시간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아 채널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눈부신 석양의 빛줄기가 정확하게 침대 머리맡에 와닿는 시간, 세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간호사가 와 주겠지... 50센티미터 앞에 앉아있는 10살된 아들의 숱많은 머리털 한 번 쓸어줄 수 없는 기분을 무어라 표현할 지 울부짖는 그. 극악무도한? 불공평한? 더러운? 끔찍한?


E S A R I N T U L O M D P C F B V H G J Q Z Y X K W
얼핏 보기에 무질서해 보이는 이 글자행렬은, 불어에서 사용되는 빈도에 따라 철자를 배치한 그의 알파벳표이다. 그는 이 알파벳표를 보고 원하는 글자에서 눈을 깜박인다. 이 기호체계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라고 한다. 크로스워드나 스크래블 애호가들은 적응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여자들이 쉽게 익숙해진다.


이렇게 낱말 하나를 전하기 위해 하나 남은 눈꺼풀을 수없이 움직이는 방법으로, 우리는 이 책을 갖게 되었다. 콧등의 파리조차 쫓지 못하는 지금 생각하면 일상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면도하기, 옷입기, 코코아 마시기는 물론, 늘씬한 갈색 머리 여인과 함께 잠을 자고 일어났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인지도 모르고 툴툴거리며 일어났던 날들. 그 날들에 대한 현기증나는 기억과, 잠수복 속에 갇힌 믿지못할 상황을 놀랍게도 그는 유머로 갈무리한다.


고도로 뛰어난 언어감각과 상상력으로 무장한 자신만의 우주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운명을 바꿔놓은 불운을 농담으로 돌릴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유머가 통곡보다 더 깊은 슬픔임을 알게 된다.
세 명의 간호보조사가 자신을 침대에 누이는 동작이, 자동차의 트렁크에 방금 살해한 훼방꾼의 시체를 억지로 쑤셔넣는 추리영화 속의 갱 같다고 말하는 그. ‘식물인간’이라는 세간의 호칭에 저항하기 위하여, 자신의 지적 잠재력이 시금치나 당근의 지적 능력보다 월등하게 우수함을 증명하기 위해 책을 쓴다는 그.  오, 하느님!


편지이며 일기이며 유서인 그의 책을 평소 습관대로 빨리 읽어내려가는 것이 너무 죄스러웠다. 늘 하던대로, 책을 읽으며 어떻게 리뷰를 쓸까 궁리하는 것이 민망했다. 멀쩡한 몸을 가지고도 탁하고 무겁게 살아가는 우리들, 내 영혼의 나비는 아직도 꼬치에서 웅크리고 나올 생각을 않는데, 그는 잠수복에서 빠져나와 훨훨 날아갔다. 우리에게 살아있음이 기적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조차 기적인 것을 가르쳐주고.


“열쇠로 가득찬 이 세상에 내 잠수복을 열어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종점 없는 지하철 노선은 없을까? 나의 자유를 되찾아줄 막강한 화폐는 없을까? 다른 곳에서 구해 보아야겠다. 나는 그 곳으로 간다.”
Posted by 미탄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