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새알심2008. 9. 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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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에 집을 나섰습니다.
생각보다 어두워서 겁이 살짝 났습니다.
멀리 노동 일을 가는 듯한 남자의 실루엣이 음울합니다.
담청색 하늘에 아직도 별이 총총하여 북두칠성을 찾아보며 잠시 화서공원에서 서성였습니다.
이내 하늘이 빛바랜 도화지처럼 희부염해지더니 별이 사라지더군요.
성벽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수원 화성에서 가장 높은 서장대에서 해뜨는 것을 볼 생각입니다.

며칠 동안 좀 우울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어르신'의 나이에 도달해놓고도 아직도 철이 없는 내가 한심해서요.
나의 자존감, 할 수 있다는 열정 그 모든 것이 현실감없는 공중누각으로 느껴졌습니다.
어느 싯귀처럼, 저 잘난 맛에 까불대며 나무를 타고 오르던 나팔꽃 덩굴이
문득 잘려나간 제 밑동을 내려다 보는 것 처럼 아뜩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 살아가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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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해를 기다리며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당최 중구난방의 체험 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참, 지지리도 가진 것이 없구나 한심한 생각이 절로 납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자유롭게 느껴졌습니다.
물질과 명예에 별로 욕심이 없다는 데에도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딱히 무엇이 되고 싶고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삶의 진수를 찾아 세상 끝까지라도 갈 수 있는 자유인의 소질을 타고난 셈입니다.

이제 세상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욱 낮아졌습니다.

내가 저지른 일은 어느 것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어제에서 오늘이 비롯되었으므로
미래로 날아가 오늘을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바로 오늘
무엇을 해야할 지 생각합니다.

난생처음 삶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이
아무 것도 몰랐기에 겁대가리 없었던 젊은 날의 만용에 비해
결코 무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갑자기 해가 엄지손톱 만큼 고개를  내밀더니
마주 쳐다볼 수도 없는 빛의 덩어리가 둥실 떠오릅니다.
수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어렵게 어렵게 배워나가는 자에게
다시 살아볼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이 나의 인생입니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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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달자

    6개월만인가, 저도 오래만에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고 놀러왔습니다.
    누님이 듣기에는 좀 거시기할지 모르지만
    저 역시 가을이 시작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연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 요즘, 아니 진작부터 회사에서 일하는 게 너무 재미가 없어서
    하루에도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불쑥 찾아옵니다.
    그래도, 밥벌이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 꾹 참고 있습니다.

    가을에는 이것저것 해보면서, 발로 뛰면서 뭔가 꺼리를 궁리해볼까 합니다.
    우리의 뇌는 굉장히 보수적인 거 같아요.
    뭔가 관성화된 습관과 고정관념에서 탈피한다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뭔가 새로운 게 없을까?
    이런 물음이 우리를 다시 살게 만들고 활기를 주는 것 같아요.

    누님도 자유인의 마음으로 일상에서 실험을 많이 해보세요.
    물론 지금도 여유있어 보입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자유로운 모습입니다.

    얼마 전에 존 카바트 진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명상 책을 봤는데,
    나를 들여다 보는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참고하세요.

    2008.09.03 09:06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올 가을에, 이것저것 해보면서 발로 뛰면서 꺼리를 만들어보는 작업에 나 좀 끼워줘요. ^^

      기질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서 스터디와 세미나, 브레인스토밍 같은 걸 하면서, 여러 영역과 관심사를 뒤틀어보고 붙여보고 늘려보면서 틈새찾기!

      2008.09.03 20:42 [ ADDR : EDIT/ DEL ]
  2. 이젠 새벽 5시면 어두운 데 어딜 가시나 했습니다.
    미탄님의 인생을 만나러 가셨군요.
    전 나름 만용을 부리던 시간에서 삶을 생각하는 시간의 여행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내 안의 나를 찾지는 못 했지만 들려다 보기를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를 찾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2008.09.03 23:5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언젠가 나를 찾으면 말이 따로 필요없지 않을까요?
      아~~ 이거였구나 잔잔한 파문처럼 몸을 감싸오는 희열 속에 그저 빙긋 웃을 뿐. ^^

      2008.09.04 08:32 [ ADDR : EDIT/ DEL ]
  3. 아마도, 제 주변의 사람들 중 가장 젊게 사시는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김포로 이사 온 걸 계기로 조금 부지런해진 것이 환한 6시인데..
    그래도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더 부지런해질 거에요..
    제가 더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해가 더 늦게 뜰 테니까요..ㅎㅎ
    전 두 번째 사진보다 첫 번째 사진이 더 좋아요.
    일출보다 그 직전의 여명 말이죠.
    한낮이 결혼생활, 일출이 신혼생활이면, 여명은 연애 아니 열애의 시간이니까요..
    암튼.
    이런저런 생각 많은 요즘입니다.

    2008.09.04 07:3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이사를 하느라 바빴겠네요.
      나야말로 생각이 아~~~~~ 주 많을 때라서 ^^
      요즘은 어떤 곳에 사느냐도 자주 생각하네요.
      산책로와 도서관이 있는 지금 이 곳이 아주 좋기도 하구요.

      으음, 전문가가 사진 좋다고 하니까 기분좋네요. ^^

      2008.09.04 08:35 [ ADDR : EDIT/ DEL ]
  4. 오달자

    아, 제 블로그에 오시면 서로이웃 신청을 하세요.
    제가 일상적인 얘기는 이웃에게만 공개를 해서요.

    2008.09.04 13:19 [ ADDR : EDIT/ DEL : REPLY ]
  5. 몇달에 한번씩 저도 사는게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냥 사는 것도 힘든데, 사람답게 '잘' 사는 것은 너무 힘든듯 합니다.

    사진에 갈수록 운치가 더해집니다... 나중에 사진전 여시는 것 아닌가요? ^^

    2008.09.05 03:2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우선 디카로나마 좀 더 사진에 공들여보려구요, 분명한 마음의 이끌림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에서요. 쉐아르님의 따뜻한 공감에 감사드립니다.

      2008.09.05 07:19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