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새알심2008. 5. 22. 20:16
뜬금없이 하나 발견한 것이 있다. 내가 거의 과거를 떠올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를 자주 떠올리는 사고습관은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아니 어떤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그리움이든 회한이든 그다지 건강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과거는 혼이요, 미래는 꿈이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현재라는 말처럼, 우리는 오직 현재 만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지난 날도 아주 밋밋하지는 않았다. ^^ 가령 이런 시를 쓴 적도 있다.



이십 오년

단조롭고 밋밋한 내 청춘의 갈피에
그래도 남달랐지 싶은
선배의 몸짓 하나가 있다.
경동교회나 과천 영보수녀원에서
아무 말 하지 않았어도
가끔 꺼내보는
어깨짓 하나가 있다.
이십 오년만에 마주한 그는
그래도 쟤 예쁘게 컸다는 소리를 하여
예쁘지 않게 늙는 중인 나를 웃기더니,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 때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노라고
방 하나에 식구들이 바글바글했노라고
그 얘기만 한다.
회를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한 번 안아보자며 슬쩍 당기더니
이마에 입술을 댄다.
사람많은 종각 지하철역에서였다.
이래저래 그의 속내는
또다시 이십 오년 후에나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오직 지금만이 지금이야,  까르페 디엠에 충실한 내 라이프스타일이 철퇴를 맞고 있다. 조금씩 철이 드는 까닭이다. 워낙 혼자 노는 편이라 연령차별주의에 멍들지 않은 편인데도, 세월의 위력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 남아있는 시간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따져보게 된다. 오늘을 즐기기보다 내일을 위해 지금 헌신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생긴다. 사소한 즐거움을 모조리 반납하고 한 가지 목표에 올인해도 성취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호시절에 발판을 좀 마련해 두었어야 하는데,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았는지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언제나 내 결론은 '나답게 살기'이다. 그나마 내가 갖고 있는 열정과 에너지를 빼면 그야말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수명연장시대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기까지 한다. 후반생은 철없는 사람을 위한 것이야. 전반부에 너무 열심히 살고, 많은 것을 이룬 사람은 슬슬 쉬고 싶겠지만, 철없이 삶을 허비한 사람은 이제야말로 한 번 제대로 살아볼 마지막 기회니까 말이야.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라는 말처럼, 남아있는 시간을 완전히 장악하는 거야. 내가 시도하고 실험한 것들의 결과를 나조차 궁금해하며,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거야. 그밖에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어?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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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비꽃

    미탄님, 제게는 이런 글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개인사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해도 불러내어 기억해 준다면 의미가 있는 까닭입니다. 우연히 그 속살을 들여다 보는 사람에게는 '진정성'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의 역사 속의 순간을 스스로 불러 와서 오늘의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될 때, 그를 읽는 사람 역시 그의 역사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그의 깨우침에 한 표를 던지며 나의 조촐한 기억들도 아우성치며 되살아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가 살아온 역사의 사소하지만 의미있던 기억과 진정함은 언제나 제게 떨리는 감동을 줍니다.
    '블로그-공개된 일기장'... 비밀히 내면을 들여다보는 스스로의 작업과 누군가가 읽을지도 모른다는 공적인 글쓰기. 그 사이의 긴장이 글쓰는 이의 동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긴장을 오늘의 글에서 읽었습니다. 저는 이런 글이 좋습니다.

    2008.05.23 12:02 [ ADDR : EDIT/ DEL : REPLY ]
    • 좋은 글은 글 쓴 사람을 드러낸다는 측면에 부합되는 이야기네요. 사실 나는 정보를 모아서 전달하는 데는 아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답니다. 오로지 내 경험, 내 마음, 내 느낌 밖에 없는 사람이라서요. ^^ 이런 내 글쓰기를 어떻게 상품화할 수 있을지 막막하네요.

      2008.05.23 16:49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