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경, 천 개의 공감, 한겨레출판, 2006


얼마 전에 오랫동안 ‘주역’을 공부하신 분의 강의를 들을 일이 있었다. 그 분에 의하면, ‘주역’은 ‘시간에 관한 책’이라고 했다. 전체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나, ‘점’을 찍어보는 책이라고. 그런데 그 ‘점’을 찍어주는 것은 제3자가 아니라, 바로 본인 자신이라는 것이다. 30년동안 역술인을 해보니, 점을 보러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더란다. 그런데 어디에도, 운명을 바꾸는 비법 같은 것은 없고, 오직 삶에 대한 자신감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이다. ‘자기주도적인 삶’에 대한 확인이 아주 명쾌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권의 ‘자기주도적인 삶’에 대한 지침서가 있다. 작가 김형경이 한겨레신문에서 가졌던 상담코너를 정리한 ‘심리 치유 에세이’이다. 일단 굉장히 편집을 잘 했다. 유사한 질문을 모아 답변내용을 네 파트로 나누었다. 자기알기, 가족관계, 성과 사랑, 관계맺기인데, 제목만 들어도 저절로 읽어보고 싶어지는 항목이 아닌가. 게다가 답변에 대한 소제목과, 별도로 답변의 내용을 한 줄로 압축한 문장, 군데군데 인용한 구절이 모두 명 카피수준이다. 모두 심장이나 허파쯤에 와서 달라붙는다.

화는 보살핌을 간절히 바라는 자신의 아기다.  - 틱 낫 한

자살보다 섹스.  - 무라카미 류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 안에서 당신의 일부인 그 어떤 점을 발견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 헤르만 헤세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신기했던 것은, 김형경의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처방이다. 임상경험이 풍부한 정신분석의처럼, 그녀는 표현을 에둘르지 않고, 자신있게 정곡을 찌른다. 그녀의 문장은 유려하나 모호하지 않고, 단정적이나 못을 박지 않는다. 혹시 그녀가 잘못 생각한 것은 없을까, 조금 걱정이 될 정도이다.


정신분석적 심리치료는 자주 연금술에 비유된다고 한다. 16세기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는 모든 종류의 물질은 수은, 유황, 소금으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 세 가지 물질을 어떤 비율로 결합하느냐에 황금을 얻을 수 있는 비밀이 숨어있다고 했다. 인간 정신도 이와 같아서 원래 타고나는 충동인 성적 욕망과 공격성, 거기에서 파생되는 분노와 불안 등을 어떻게 보살피고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한 인간이 금이 될수도 있고, 구리가 될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최초의 연금술사는 엄마이다. 정신분석은 두 번째 연금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연금술은 성인이 되어 하게되는 사랑이다. 누구의 내면에나 존재하는 사랑과 분노, 불안과 공포, 질투와 시기, 냉담과 관용...의 요소를 어떻게 어떤 비율로 결합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성격이나 정체성이 빚어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떤 연금술도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느 연금술사도 ‘꿈의 황금’을 만들지 못했듯이, 인간 정신에도 ‘정상’의 개념은 없다는 것이다. 내면의 갈등과 긴장을 조절하고, 중단되었던 발달을 계속하며, 생의 자율성과 안정감을 획득해나가는 삶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내게도 익숙한 혹은 낯선 질문들에 대해 김형경은 ‘천 개의 공감’과 ‘명쾌한 해결책’을 드러낸다. 작은 일에 너무 상처를 잘 받는다는 토로에 대해서는, 타인에게 기대치가 너무 크다, 당신의 기대를 채워줄 수 있는 외부인은 없다, 과도하게 부풀려지고 미화된 사랑을 스스로에게 베풀라고 얘기한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구나 하는 사실을 소스라치도록 절감하는, ‘고립무원의 느낌’이 심리치료가 끝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마무리 꼭지인 ‘중년의 문턱에서 생의 목표를 수정한다’는 글은 아름답고 숙연했다. 이것 역시 중년에 도달한 작가 자신에게 해 주는 말에 다름아니리라. 중년의 환골탈태를 얘기하기 위해, 작가는 독수리를 동원한다. 독수리의 수명은 보통 7 - 80년이라고 한다. 그 중 40년쯤 되는 시기에 독수리는 높은 산에 올라 스스로 바위에 부딪쳐서 부리와 발톱을 부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그런 다음 새롭게 40년을 다시 산다는 것이다.

   

우리도 독수리처럼 중년기에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그 다음 생을 확장해나가야 할텐데, 작가가 권하는 방법론 중에, ‘자기만의 서사 쓰기’와 ‘천복을 기억하는 일’이 유독 마음에 와 닿는다. 공동체가 제시해주지 못하는 삶의 틀을 저마다의 내면에서 발견하고, 자기만의 삶의 서사를 써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자기 개념과 생의 비전이 형성된다고. 이는 내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의 이야기’ 쓰기와 일치한다.

   

천복이란 우리가 억압하고 외면해온 감성, 직관, 자연, 신비주의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이번 생에서 타고난 소명, 그것을 완수할 역량과 자질, 운명에 내재된 비밀, 생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뜻한다. 조셉 켐벨이 얘기한 바, 우리 생의 본래적 소명이나 가치에 닿기 위해, ‘너의 천복을 따르라’는 것.

   

우리가 생애 초기부터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억압하고, 이성과 합리에 따라 재단하고, 사회화 문명화 속에서 방치해둔 정신의 원시적 힘의 영역을 되살리라는 부분에서, 내 마음 속에 조용한 희열이 일었다. 바로 이거군.

이 모든 지식과 포용력이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반생에서 우러난 것임을 알기에 작가의 조언이 더욱 소중하다. 그래서 이 책은 자기계발서로도 읽을 수 있다. 어쩌면 쓸모없다고 생각해온 경험 속에 직업적 자산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보물이 숨겨있을수도 있다. 오랜 우울증과 방황에서 벗어나, 자신을 재료로 했던 실험을 토대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서는 김형경은 아름답다. 나 자신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놓지 않으면, 우리도 그처럼 소중한 계기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내 인생을 ‘꿈의 황금’으로 만들기 위한 연금술에 진력해야 할 때이다.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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