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펌글창고2008. 3. 3. 08:07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칸딘스키, Blue Crest



어제(2월 27일) 와인클라스에 가는 길에 시간을 두 시간 앞당겨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 들렀습니다. 회사 바로 앞에 걸려진 '칸딘스키와 러시아거장전' 배너를 몇 달 전부터 보고 한 번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면서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이 전시회가 어제 끝난다는 걸 알고, 일부러 시간을 낸 것입니다. 덕분에 시립미술관 고흐전과 더불어 이번 주 두 개의 멋진 전시회를 보게 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전시회 마지막 날, 마지막 두 시간을 남겨 두고…정말 스릴 넘치는 시간의 곡예를 하며 전시된 그림들을 보았습니다. 별로 볼 기회가 없었던 러시가 거장들의 리얼리티가 손에 만져지는 멋진 그림들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 어찌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일을 그만두고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잡아 미술관으로 달려가길 정말 잘했습니다. 혼자서 멋진 데이트를 했습니다. 레핀과 마소도예프라는 두 화가의 이름이 내 가슴에 새롭게 새겨지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글에 칸딘스키라는 화가만 담아보고 싶습니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에서 20세기 아방가르드까지 당대 러시아의 대화가들의 그림을 91점이나 전시한 이번 전시회는, 제목이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입니다. 칸딘스키의 명성을 이용해 관람객을 많이 유치하려는 홍보전략의 일환인 걸 알지만 이름을 내건 것에 비해 칸딘스키의 그림은 정말 적었습니다. 추상화 두 점(블루 크레스트, 구성 #223)과, 추상화가가 되기 이전 후기 인상주의와 프랑스 야수파 기법으로 제작된 작은 풍경화 두 점(가을 강, 여름 풍경)이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주최측에서는 그 네 점을 위해 따로 관을 마련해, 이 거장예술가를 극도로 예우하고 있더군요. 그림이 눈에 잘 띄도록 벽을 빨간색으로 칠하고 그 위에 칸딘스키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적어 두었습니다. 그 중에 제 눈에 들어온 글귀가 있었습니다. 칼 니렌도르프라는 사람이 던진 질문에 대한 칸딘스키의 대답입니다.
사진으로 찍을 수 없어 수고스럽지만 손으로 적어왔습니다.

칼 니렌도르프:
추상미술은 자연과 무관하다고 종종 주장되는데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칸딘스키: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추상화는 겉 옷을 버리기는 하지만 자연의 법칙을 버리진 않습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우주의 법칙입니다. 예술은 우주의 법칙과 직결되어 있으며 그 아래 종속될 때만 위대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겉옷을 벗어 던졌으나 우주의 법칙은 버리지 않았다.
이 말이 저에게 꽂혔습니다.

아다시피 칸딘스키의 미술은 추상미술이어서 사물의 내용은 사라지고, 그 형태도 없습니다. 있다면 무형의 형태이고, 이 또한 알아볼 수 없습니다.
보아도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추상미술은 작가의 설명이 아니고서는 보는 사람이 각자 그림을 해석하면 됩니다.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그림은 던져진 질문과 같습니다.
그 질문의 답은 보는 사람의 몫입니다.

여기서 저는 오히려 전율을 느낍니다.
겉 옷을 벗어 던진 그림 속에서 작가가 알몸으로 달려들어 표현하고자 했던 진실, 혹은 본질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도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이제 그의 그림은 그저 그림이 아닌, 우리를 일종의 모험으로 유도하는 도전장이 됩니다.

현대 추상 미술의 선구자, 피아노와 첼로에도 능했던 법학자. 모네의 그림에 강하게 끌린 칸딘스키는 30살에 그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화실로 들어서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 거꾸로 걸려있는 걸 보고 추상 미술의 힌트를 얻었다고 하네요. 그림의 내용은 모호해졌지만 색과 형태만으로도 많은 걸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 이후 그는 색채, 선, 형태 만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순수한 시각 언어'를 찾아내는데 몰두합니다.

이미 기본기를 엄청나게 다진 연후에야 시작한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에는 칸딘스키 표 철학이 베이스에 깔려 있습니다. 그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그의 책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색은 ‘예술가로부터’ 그리고 ‘영혼의 떨림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색은 ‘죽은 말(言)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창조력 풍부한 추상의 영혼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때의 추상의 영혼은 ‘계시를 드러내기 위한 형식을 발견한 예술이며 동시에 공간의 음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심포니의 형태를 띄게 된다.”

아, 저는 이 말을 기억하고 칸딘스키의 그림 ‘Blue Crest’ 로 다가갔습니다. 1917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어떤 사물을 그대로 표현할 경우 그것은 이미 그 사물이 아닙니다. 이미지는 거기 있으되, 실체로서의 현존은 그림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고민은 한 단계 진보하나 봅니다. 그것이 화가의 세계관이겠지요. 실체를 화폭에 옮겨놓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마도 고정된 형태로는 절대로 캔버스에 진실을 전달할 수 없다는 생각에 도달했을 것 같습니다.

‘블루 크레스트’ 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지적인 유희로서의 추상이 아니라면, 칸딘스키가 위대한 사상가이자,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한 위대한 예술가라면, 그의 그림 속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그림 ‘여름 풍경’은 그가 추상화가로서의 여정을 시작하기 위한 전조로 보입니다. 그는 이 그림에서 사물의 입체감과 윤곽 사이의 경계를 거의 허물고 있습니다. 색채도 강렬합니다. 그 만큼 그의 영혼이 자유로와지기 시작한 것이겠지요.

‘블루 크레스트’를 보고 있으니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응집, 발산, 폭발, 음악, 리듬, 빛, 파장, 산산히 흩어진 색채, 선…. 인간의 이성이 아닌 감정과 직관, 영혼의 섬세한 흐름에 기대어 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칸딘스키의 고양된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구상예술과는 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모호하고 잡히지 않는 것은 불편하고, 참기 어려웠던 것이 저입니다. 그런데 칸딘스키 작품 앞에서 이렇게 오래 서서 그의 생각을 좇고 있다니요, 오늘은 저도 제가 신기합니다.

요즘 읽고 있는 ‘생각의 탄생’이나 ‘신화의 힘’, ‘아름다움이 그대를 구원할거야’ 같은 일련의 책들이 내 아침 글쓰기의 주제들로 살아 오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내 마음 속에서 춤을 춥니다. 그의 그림도 내 마음을 따라 춤을 춥니다. 그림 속에 자유롭게 표류하는 선들은 서로 어우러져 음악을 연주합니다. 자신이 피아노 연주가이기도 했던 칸딘스키는 ‘색채는 건반이다. 눈은 망치이다. 영혼은 많은 줄을 가진 피아노다. 예술가란 그 건반을 이것저것 두들겨 목적에 부합시켜 사람들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사람’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그림이 음악 같은 느낌을 주는 건 그래서 우연이 아닙니다. 다양한 색채와 선은 그의 그림 속에서 서로 만나고 부딪히며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불협화음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영혼을 흔드는 힘은 그 어느 음악에 못지 않습니다.

이제 제 눈에 꽃도 보이고, 자신을 응시하는 사람의 선한 눈도 보입니다. 응집과 폭발로만 보이던 그의 그림이 따뜻한 눈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폭풍처럼 고양되던 에너지들이 차분한 힘으로 내면화됩니다. 그의 그림 한 켠에서 구상의 잔재를 발견합니다. 산 위에 몇 채의 집들이 보입니다. 그 집들은 태양의 파랗고 붉은 빛 속에 밝게 빛납니다. 묵시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내 안으로 투영되고, 뭔지 모를 충만함이 나를 감쌉니다.

이 작품에 대해 블라디미르 크루글로프라는 러시아 평론가는 이렇게 평했습니다.
“칸딘스키 고유의 우주적 분위기와 출생과 죽음의 신비로운 비밀에 관한 이끌림, 더불어 1917년 혁명기의 러시아적 현실에서 받은 영감이 한 데 어우러진 작품이다. 변혁에의 열망, 현대문명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불안감, 인간에 대한 환멸을 가져온 1차 대전이 당시 인텔리겐차들을 사로잡았던 시대적 분위기가 그의 미술에도 어떤 식으로든 투영되었다.”

참, 평론가적인 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내 눈은 특정 대상의 모습을 화폭에서 제거하는 대신 칸딘스키가 얻고자 했던 개인적인 것에 더 집중합니다. 그가 화폭에 담으려 했던 어떤 정신, 그것이 중요합니다.

내일 다시 이 자리에 서면 아마 다른 것들이 내 감성의 레이더에 잡힐 것입니다.
추상화란 그런 점에서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Posted by 미탄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칸딘스키'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글입니다.
    저는 '칸딘스키'를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미탄님의 글을 보고 나니 '칸딘스키'가 아는 사람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역시 미탄님의 글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나봅니다.
    다녀오셨다는 글의 첫머리를 읽으면서, 미탄님과 전시회에 같이 가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네요. ^^
    동시에 전시회 감상에 '혼자' 몰입하실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지셨다는데
    저까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

    어쩌면 추상화가 사물의 본질에 더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사진보다도 더 사물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철학적 기반과 매체에 대한 기반이 탄탄하다면 말입니다.

    2008.03.03 13:5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에고~~ 이래서 '펌글'이 안좋다는 거군요. ㅜㅜ
      제 글로 오해하셨나봐요.
      요즘 자꾸 시각예술에 이끌리는 터에 발견한 글이 좋아서 퍼온 건데요, 칸딘스키의 예술론에도 땡기고해서리~~
      제 글로 오해하실만한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

      2008.03.03 20:21 [ ADDR : EDIT/ DEL ]
  2. 에공...'펌글'이라고 표시해 놓은 것을 왜 감쪽같이 놓쳤을까요.
    사람 의식이란 것이 이렇게 지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가 봅니다.
    아니 제 의식이란 것이 이렇게 집중력을 뻔히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은가 봅니다.
    다시 한 번 '의식하며 살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

    그리고 정말 미탄님의 글과 비슷했다니까요..ㅎㅎㅎ
    미탄님께서 '저를 위해' 인정해 주시니 제 무안함이 조금은 뻔뻔해지네요. ^^

    죄송합니당~

    2008.03.04 19:0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죄송이라니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말씀하셨듯이, 사람의식이란 것이 정말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 것인걸요.

      2008.03.04 19:33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