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놀이2008. 1. 14. 18:40
 이원복,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김영사 2007

이원복교수가 와인에 대한 만화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부터 배가 아팠다. 그의 전작, ‘먼 나라, 이웃나라’가 1300만 부가 팔렸다든가. 말이 1300만 부이지, 남한의 거의 전 세대가 구입을 했다는 소리이다. 애들이 어렸을 때 나도 샀으니 말이다. 최근 예사롭지 않은 와인열풍과 이원복교수의 브랜드파워에 힘입어, 이 책이 빅히트칠 것은 불보듯 뻔한 일, 그런데 나도 이 책을 샀다.


요즘 조금씩 와인이 좋아지고 있어, 내 입맛에 맞는 와인 종류 정도는 알아두어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인데다, 서문에서 밝힌 저자의 입장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와인을 공부하는 거야 얼마든지 좋다. 하지만 와인에 대한 지식을 무슨 교양의 잣대처럼 내세우거나 보통사람은 평생 한 번 마셔보기도 어려운 샤토 이름을 외우는 데 몰두하는 행태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한국에 와서 보고 놀란 어느 프랑스 와인업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입이 아니라 머리로 와인을 마시는 것 같다. 인간이 와인을 마시는 게 아니라, 와인이 인간을 마시는 것 같다.’

이는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일이다. 왜 내 기호대로 당당하게 와인을 고르고 거리낌없이 평가하지 못하는가? 와인은 어디까지나 와인일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게다가 어느 인터뷰에서 저자는 자신의 작품이 ‘자료와의 한 판 승부’라고 밝히고 있다. 원래 한 권으로 기획된 와인에 대한 만화도, 자료가 넘쳐 두 권으로 늘렸다고 한다. 저자의 안목과 수집력을 믿는 마음, 이것이 브랜드파워이리라.


일단 브랜드파워가 형성되면, 그 다음부터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않게 된다고 하던가,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처음부터 책은 나쁘지 않았다. 저자는 와인에 대한 지나친 숭배가 서구문화에 대한 경배가 아닌가 경고하고 있지만, 와인은 서구의 문화일뿐만 아니라 정치와 종교와 한몸이었다.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군수품 중에는 2,800만 병에 해당하는 와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장에서는 믿을 수 없는 식수대신이요, 사기를 돋워주는 활력소요, 부상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마취제였던 것이다. 와인은 총탄 다음으로 중요한 보급물품이었다!


와인은 기독교의 전파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수도자들은 우선 스스로 즐기기 위해 와인산업에 종사하였으며, 십자군전쟁시에는 출전하는 기사들이 자신의 땅을 기증하고 떠나는 바람에 가장 큰 와인 생산자는 교회이기도 했다.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어딜 가나 포도나무부터 심었다. 무엇보다 와인생산이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같은 면적에 곡물을 재배해 파는 것보다 이윤이 3~40배나 더 남았으니, 누군들 와인생산에 달려들지 않았으랴!


나는 이 부분에서 또 배가 아프다. 우리나라 농업도 존폐일로에 달려있고, 포도주 생산에 진력함직도 하건만, 소비자들은 단연코 수입와인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와인이 비싸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 과정에서 와인수입업자나 와인바로 대박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기회를 발견한 자에게 복이 있으리니, 기회를 발견하지 못한 자의 선망이 그들의 것이로다! ^^


이 책에는 와인의 본산 보르도 지방의 그랑 크뤼 제도를 비롯해서 많은 와인상식이 실려있지만, 내 구미를 끈 것은 이런 것이다. 1976년 미국 독립선언 200주년을 기념해 파리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와인을 비교하는 시음회가 열렸다. 프랑스와 미국의 와인 라벨을 감춘 채 맛보기로 한 것이다. 이른바 블라인드 테이스팅!  시음회의 결과는 놀라웠다. 최고의 레드와인은 미국 캘리포니아 내파밸리의 카베르네 소비뇽 제품이었고, 최고의 화이트와인 역시 캘리포니아 샤르도네 품종 제품이 선정된 것이다.


결국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와인에 대해 기본상식은 갖추되, 와인에서조차 우리 나라 특유의 냄비근성과 유행병을 양산하지는 말자는 것. 예를 들어 ‘테루아’라는 관점이 있다. 테루아는 와인을 생산하는 데 객관적인 자연조건을 말한다. 기후와 일조량, 토양, 토질, 습도... 등을 들 수 있다. 당연히 포도밭마다 테루아가 다르다. 심지어 부르고뉴의 포도원은 10미터만 떨어져 있어도 포도의 질이 달라진다. 프랑스사람들은 프랑스와인만이 진정한 테루아와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와인업계의 마케팅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 예로 1990년 보르도에서 생산된 100가지 와인을 비교한 적이 있는데, 결론은 와인맛을 결정하는 것은 테루아가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양조기술이라는 것이었다. 와인이 수확되어 주조된 연도를 나타내는 ‘빈티지’역시 마찬가지이다. 와인애호가를 위해 발행되는 ‘빈티지차트’가 있을 정도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테루아' '빈티지'에 목매지 마라~~, 품질에 비해 억수로 돈을 쓰지 마라~~ 이다. 기술이 놀랍게 발달되어 언제나 품질 좋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으므로 빈티지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와인은 엄청난 시장성을 가질 것이다. 단지 취하고 싶어 마시는 쓰디쓴 소주와, 뱃살에 위협적인 맥주와 달리, 와인은 마시는 과정 자체가 우아하고, 동맥경화도 방지해주는 웰빙음료이기 때문이다. 담배에 불을 붙여 입까지 가져오는 순간이 위로가 되듯, 와인도 따르는 동작에서부터 이야기를 품고 있다. 레드와인이 적당히 담긴, 배가 불룩 나온 글라스를 부딪칠 때 챙그랑~~ 하고나는 소리, 입 안에 오래도록 남는 향기, 와인 한 잔에 남아있는 문화사적 가치, 와인은 그 자체가 스토리텔링 제품이다.


나도 내 입맛에 맞는 단 하나의 와인을 만나고 싶다. 내 집처럼 편안한 와인바에서, 합리적인 소믈리에가 권하는 와인을 마시며,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환담하고 싶다.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을 배우며 기꺼이 즐거워하고 싶다. 나아가 지식을 공동생산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내가 꿈꾸는 모든 장면에 와인이 있다. 하지만 이원복교수처럼, 와인의 전문가가 아닌 와인의 애호가로 족하다. 와인에 대한 상식은 많이 없어도, 와인을 즐기는 마니아가 되고싶다. 불현듯 와인 한 잔이 하고 싶다. ^^


Posted by 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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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종윤

    한선생님~ 안녕하시죠? 매번 블로그에 들어와서 글 읽으면서도 변변히 댓글 한 번 못 남겼습니다. 죄송해요. 한동안 같이 사는 사람하고 홀짝홀짝 와인을 즐겼는데, 연구원하면서 유세떠느라 그 재미도 잊고 살았네요. 이 곳에 오면 매번 읽고 싶은 책이 늘어 고민이었는데, 오늘은 먹고 싶은 것이 늘어서 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2008.01.15 09:35 [ ADDR : EDIT/ DEL : REPLY ]
    • 미탄

      종윤씨, 가장역할까지 '쓰리잡스' 생활에 바쁘지요? 송년회 때 팥죽 감동이었어요. 작은 일에 최선을 다 하여 주변사람을 감동시키는 일, 살아보니 성공의 요체이던데, 종윤씨 가족이 그걸 실천하고 있더라구요. ^^

      첫 번 째 번역이 '사상서'라 만만치 않을듯도 싶은데, 종윤씨를 크게 키우려는 누군가의 섭리라고 생각하면 좋을듯하네요.

      2008.01.15 14:30 [ ADDR : EDIT/ DEL ]